프랑스, 문화와 세계
전체적으로 인문대학의 과들이 통합되는 분위기다.
각 국의 언어 전공으로 나누어져 있던 과들은 통합되어 유럽언어, 혹은 아시아 언어, 국제 언어과로 나누어져 1학년 때 공통 수업들을 듣고 2-3학년 때 세부 전공을 선택한다.
나는 다행히도 그런 복잡한 선택의 늪에 빠지지 않고 입학할 때 했던 선택으로 전공 수업을 끈질기게 배울 수 있었다. 대학을 다니다 보면 유럽 언어 중에선 독일어가 국내외 취업에 좋다는 얘기를 듣곤 하는데 그럼 동기들끼리 우린 왜 불어를 선택했지? 글쎄? 하고 침묵이 흐르는 대화를 하곤 한다. 일단 이건 별개의 문제라 하자. 앞편에서 말했듯 우리 과에 온 이들은 모두 제각각의 다른 꿈을 껴안고 온 모양이니까.
전공을 선택할 때 마음에 둔 것은 문학과 외국어, 예술이었다. 나는 예술적 관점을 이어나가겠다!
실제로 1학년 땐 불어를 중심적으로 배웠고 졸업 후에까지도 상위 수준의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 하였으니 나름 불문과에 들어가 언어 자체로도 크게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에 가기 위해 상위 급수를 취득하였던 것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불문과를 졸업하고 인문학적인 관점이 넓어진 거 외엔 얻은 게 없다 느껴질 뻔했다.
이토록 결과를 중시하는 이가 아니었는데 20대 중반이 되니 스스로가 무얼 하였나 자주 뒤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스스로 무엇이 중요한지 묻는 시기여서 그런지 그간 무엇을 얼마큼의 시간을 투자하여 이루었는가에 대해 돌아보곤 한다. 앞으로 길잡이를 잡기 위해서라 합리화한다. 난 결과를 중시하고 싶지 않다.
과정으로 다시 돌아가면,
얻은 것은 마냥 예술의 나라라고 느껴졌던 프랑스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이미지이다.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고 불리는 것이 세계대전과 수많은 침략들 사이에서 견고히 만들고 지켜낸 이미지인 것과 같이 예술과 자유, 평등의 나라라는 프랑스는 유럽의 생활환경 외에 보수적인 국가 중 하나였다. 학생으로서 1학년 때 교수님들의 말씀과 프랑스에 대한 인식, 혹은 학생들에게 하는 말을 얼핏 들었을 때 프랑스도 보수적인 국가인가? 싶었는데-물론 우리나라와 아시아만큼은 아니겠지만- 단순히 느낀 감정이 아니었다.
프랑스 문화와 기사, 유튜브 영상, 사회적 사건들을 검색하고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다 보니 가정 내에서 여성과 남성의 지위와 새로운 것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아마 우리가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유럽 국가에 느끼는 '선진국'의 이미지는 그저 '유럽'의 공통적인 이미지이지 각 국의 개별적인 이미지는 아닐 것이다.
3학년 때 막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시고 강사로 오신 교수님이 계셨는데 1학기 때 '프랑스와 유럽문명' 에 대해, 2학기 때 '세계프랑스어권의사회와문화'를 배웠다. 전자에선 프랑스에 대해 배웠고 후자에선 아프리카와 캐나다 퀘벡과 같은 전 세계에 걸쳐있는 프랑스어권 국가와 그 문화에 대해 배웠는데 가장 중심은 유럽 국가들은 과거에 획일화로 나눈 식민지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견고히 하고 그를 유지하고자 한다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것에 대해 반발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큰 예로는 발표 준비를 했던 '아르카시즘'이 있는데 프랑스 파리하면 떠오르는 도시 계획과 에펠탑, 퐁피두 센터가 처음엔 엄청난 반대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새것을 멀리하고 옛것을 지키자는 것도 있지만 그들의 과거와 역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기반으로 한 것이어서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부동산과 주변 지역의 경제적 이득으로 찬성과 반대 입장이 나누어지는 것과는 별개이다.
유럽 국가 중 프랑스하면 떠오르는 에펠탑은 거대한 철조물이라며 무시를 당하고 당시 계획을 추진하였던 대통령은 심한 욕을 먹었다. 파리에 대해 여행객들의 이미지가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어지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냄새와 청결은 우리나라처럼 상하수구 시스템이 잘 구축되지 않아서인데 과거에는 더 심해 쥐들이 현재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이를 가장 대표하는 것이 '페스트Peste' 소설이며 여전히 파리는 더러워서 별로였다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나마 나아진 것이 1853년부터 1870년까지 나폴레옹 3세가 오스만 남작에게 시켰던 파리 개조사업 이후였다.
이때, 건축 유학을 결심했던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이었던 '도시 계획'의 첫 출발이었으니 전공에서 배웠던 수업은 내게 수업과 인문학 지식 외에 큰 것을 가져다 준 것이 틀림없었다.
3학년 2학기 때와 4학년 1학기 때 배운 수업에서 프랑스어권 국가들에 배우기 시작했는데 동기 C가 KOICA에 대해 관심이 많아 같이 얘기를 나누다 그 인연으로 방학 때 교내에 있는 국제개발사업팀에서 근로를 하며 교수님과 인턴 선배들과 일을 할 수 있었다. 나의 심심했던 학교 생활에서 유일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건수였으며 교수님께서 교환학생에서 귀국하자마자 "바로 복학하나요?" 물으신 걸 보면 일도 나름 잘 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경험,
아마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것도 많겠지만 일주일에 3시간 남짓 수업과 과제를 통해 국제 사회와 프랑스, 언어 사이의 관계를 내가 이해한 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전공 특성상 코이카KOICA에 대해서도 알고 근로를 통해 직접 무슨 일을 하는지도 배울 수 있었으니 지금까지 인생 경험 중 제일 실무다운 것아닐까 싶다. 취업에 대해 생각이 아예 없다가 학원 알바 외에 일을 한 분야가 처음이다 보니 직장 생활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도 사라졌었다.
그때의 기억으로 취업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라는 생각을 하니. 엄청나게 빠르고 강하게 흔들리는 갈대가 아닐까 싶다.
불문과에서 아마 제일 크게 얻은 건 여행이지 않을까 싶다. 동기 P와 매일 만나면 하는 얘기는 딱 하나다. 우리가 영문과였으면 돈 모아서 시간이 날 때마다 미주에 갔을까?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을까? 답은 글쎄다.
불문과에 들어간 20대 초반의 선택으로 2학년 때부터 돈을 모아 3학년 때 40일 여행을 갔던 이윤 솔직히 하나였다. 불어를 배우다 보니 프랑스에 대한 친밀감? 그러니 다른 나라도 아니고, 동유럽도 아니고 북유럽도 아니고 서유럽에 가서 약 10일 좀 넘게 프랑스에 있었지. 그게 끝인가? 또 1년 후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P와 함께.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P는 한 학기를 더 다니고 돌아왔을 것이고 나는 돈을 모아 또 떠났을 것이다.
언어가 된다는 건 그런 것 같다. 여행 그 이상의 삶을 건네어 주는 것.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건 그 나라에서 지내는 삶에 좀 더 버벅이지 않을 수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여행객이지만 최대한 현지인 같을 수 있는 점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