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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선열 Nov 02. 2024

새벽에 마시는 생강차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날씨입니다. 난방을 하기엔 아직  이르고, 그냥 버티기엔 찬바람이 조금 부담스러운 새벽입니다. 이럴 땐 차 한 잔을 만들어요. 전기 주전자가 편하기는 하지만  가스불을 켭니다. 오렌지색 불빛에  주변이 먼저 환해지고 달아오른 주전자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옵니다. 미미하지만 집안 구석구석  따스함이 번져요.

커다란 머그잔에 차 한 잔을 따르고 두 손으로 감싸지면 손끝에서 온몸으로 따스함이 전해지지요. 새벽이 주는  청정함에  온기가 섞여 듭니다. 사르르 몸이 녹듯 마음도 따뜻해집니다 


새벽에는 생강차를 마셔요,  향기 좋은 커피 한 잔 생각이 간절하지만 잠깐 유보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곧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푸는 마음을 다스리며 먼저 생강차 한 잔을 준비합니다. 나이 들며 생긴 습관입니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새벽 빈속에 자극이 심하더라고요, 커피의 향과 명료하게 의식을 깨우는 작용을 대신할, 덜 자극적인 무엇이 필요했습니다. 마침 선배가 만들어 준 생강차가 있었습니다

커피처럼 진하지는 않지만 알싸한 생강의 향이 제법 마음에 들었습니다. 새벽 정기와 어우러져 아직 다스리지 못한 의식을 깨우더라고요. 꿀 한 스푼을 첨가하면 달콤함과 따스함에 안도감도 섞여 듭니다. 하루를 거뜬히 이겨낼 듯한 건강함입니다.


그다음에 마시는 커피는 안전하지요. 향과 자극을 마음껏 누리되 건강 염려는 생강차에게 맡겨 둡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아침이 됩니다 

커다란 주전자에  생강을 얇게 빚어 넣고 감초와 계피를 조금 섞어 오래  끓이면  은은한 향기가 일품인 생강차가 됩니다. 생강차는 따로 보관하지 않고 주전자 채 가스레인지 위에 둡니다. 새벽 차가운 공기를 덥히며 주변에 퍼지는 김을 좋아하거든요. 새벽마다 가스불을 켜고 생강차를 데웁니다. 조용한  새벽 공기를 깨는 차 끓이기는 마치 새벽을 여는 의식 같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부뚜막에 정한 수를 떠 놓고 하루를 시작하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경건하기도 하고 기대도 있고 축원도 들어 있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따스한  차 한 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열기를 느끼는 순간이 참 좋습니다. 정화된 새벽 정기가 같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듯합니다.


다음에 마시는 커피도 좋아합니다. 생강차는 커피를 마시기 위한 준비 작업이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커피를 오래 즐기고 싶거든요. 자극은 줄이고 즐거움은 두 배로 누리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좋아하는 커피를 오래 즐기기 위해 생강차로 건강을 다져 놓아야 하듯 말입니다.

살다 보면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바뀌기도 합니다. 해야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되는 거지요.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하던 생강차 만들기가 어느새 좋아졌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된 거지요. 의무와 책임으로 무거웠던 젊은 날을 되돌아봅니다. 어차피 감당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라면 하고 싶은 일로 승화시켜 볼 걸 그랬습니다. 해야 할 일에 매달리느라 하고 싶은 일을 외면했던 어리석음입니다. 한 박자 늦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향긋한 커피를 오래 즐기기 위해서 생강차를 만들다가 생강차 만드는 기쁨을 알아버릴 수도 있거든요. 한 시간 유보한 커피 마시기가 새로운 즐거움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짐이 무거워 빨리 도착하고 싶어도 잠시 쉬어 보세요. 앞만 보고 달리는 것과는 다르게 많은 걸 볼 수 있습니다. 해야만 하는 일이 하고 하고 싶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어렵더라고요. 젊음의 혈기는 왕성하고 치열하니 어떻든 앞서고 싶거든요. 한치의 틈도 안 주고  앞으로만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멀리 가는 것도 좋지만 많이 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많이 보다 보면 멀리 갈 수 있는 지름길도 볼 수 있거든요 

나이 들어 얻은 지혜입니다. 나이 드는 게  나쁘지만은 않은 이유입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생강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가는 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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