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문을 읽다가 '화성에 파라마운트 테마파크를 만든다'는 기사를 보았다 "화성에? 벌써?" 놀라서 자세히 읽어 보니 위성 화성이 아니라 경기도 화성이었다. 제목만 보고 우주개발로 착각한 것이다. 제목을 경기도 화성이라고 밝혔다면 그 기사를 읽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하고는 별무상관인 일이라고 간과해 버렸을 것이다. 별나라 화성이었기에 관심을 끌어 기사를 끝까지 읽어 보게 되었다. 뜻하지는 않았으나 기사를 읽은 후에도 나쁘지는 않았다. 변하고 있는 화성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제목을 잘 지었기에 독자를 끌어당길 수 있었다. 읽고 난 후 기사가 내게 흥미를 끌지 못했다면 속았다는 느낌이 들 것 같기는 하다 . 내키지 않은 글이라 하더라도 기사내용이 충실하면 읽은 보람을 가질 수 있다. 이름을 잘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름값을 할 수 있어야 추앙받는 이름이 될 수 있다
호랑이, 고양이, 독수리, 참새, 만물에는 걸맞은 이름이 있다. 호랑이는 호랑이답고 고양이는 고양이답다. 둘의 이름이 바뀌었다면 몹시 어색할 것 같다. 호랑이가 고양이고 독수리가 참새라는 이름이었다면 쉽게 부르기 힘들었을 것 같다.
사물에는 걸맞은 이름이 만들어지고 널리 쓰여야 제값을 하는데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름을 부르는데 인색하다. 유명인들도 실명보다는 호나 필명 등 다른 이름을 하나씩 가지고 있고 직함으로 불리기를 원하기도 한다. 거리에 나가 회장님 하고 부르면 성인들 모두가 뒤돌아 본다고 한다. "회장님"이라는 직함 때문이다. 직함도 시대에 따라 평가 절상하여 70년대에 사장님이 2000년대에 회장님으로 격상되었다. 회장님 다음엔 어떤 직함이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남자들은 그나마 직함 위에 성씨를 붙인다. 김 회장님, 박 회장님, 이런 식이다.
핏줄이 중요하던 시대에 성씨는 신분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성씨 이야기를 할 때면 본관을 따지게 되고 단일 민족이니 누구의 몇 대 손이라는 신분이 밝혀지면 졸지에 혈연으로 얽힌 사이가 되어 버린다.
여자의 이름은 거의 부르지 않는다. 누구의 아내, 자식들의 엄마일 뿐이다. 남편이나 자식을 앞세우지 않을 때에도 00 댁 하며 친정 고향을 지칭하는 택호로 부르기도 한다. 고향에 가면 우리 할머니는 서울댁이었고 우리는 서울댁 손주들이었다. 우리 엄마는 선생님이었고 (그 당시에는 여선생이 적었기 때문에 평생 그렇게 불린 것 같다) 지금 나는 1511호 아줌마, 혹은 할머니이다. 할머니라는 호칭이 어색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이런 세태에 익숙해지니 이름을 불리는 게 어색하기는 하다. 내 이름자를 좋아하면서도 어린 사람들에게 이름을 불리면 마치 모욕당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내 이름자를 꽁꽁 숨겨두고 선우라는 닉네임을 공공연하게 쓰고 있다.
이름자는 발가벗겨지는 것 같고 닉네임은 옷을 입은 듯하다고 할까? 벗은 몸은 아무에게나 보여 줄 수 없다. 가족이나 어릴 적 친구, 오래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이름을 많이 부르게 된다. 사회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직함으로 호칭을 시작해서 친해지고 나서야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사회에서 만난 친한 친구가 있다. 또래이면서 오래 같은 일을 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같이 나누기도 했으며 절친이라는 표현을 서로 간에 쓰기도 했으니 특별한 친분관계라 할만한데 그 친구는 내 이름을 정확히 부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친하지 않으니 이름을 부르는 게 어색한가 보다 했는데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게 아니라 다르게 부르는 것이다. 마치 선우를 영우라고 하는 것처럼,
혹시 이름자를 잘 못 알았나 싶어 정확히 내 이름자를 고쳐서 가르쳐 주었는데도 고쳐지지가 않았다. 서운했다, 나를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다감하고 성실한 그녀의 성정을 아는 까닭에 서너 번까지 고쳐 주었는데도
여전히 다르게 쓰고 있다.
지금은 그러려니 개의치 않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다른 이름으로 부를 때는 내가 예민한 건지 그녀가 무신경한 건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내 이름자를 쓸 수 있는 특권을 오용당하고 있다고 표현한다면 지나치게 예민한 걸까?
선우라는 닉네임도 좋아한다. 성씨를 붙이면 우선우가 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이후로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역삼역 우선우 하는 재미도 있다. 닉네임은 숨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 같다. 본명은 하나이지만 별명은 여러 개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름뿐만 아니라 나를 대신할 아바타도 만드는 세상이니 나를 대신할 무언가가 있다는 건 신선한 느낌이기도 하다. 자유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나답지 않아도 될듯하다. 나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포기해야 할 일탈을 감행해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듯한 해방감이다.
내 이름자에 걸맞은 인품을 갖추기가 어려워 나는 지금 선우 뒤에 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좌충우돌 선우로 살다가 묘비명에는 본명으로 적힐 수 있을까? 평생을 선우로 살았다는 사족이 붙을 수도 있겠다.
누군가가 불러주어야 꽃이 될 수 있다는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이름은 나를 부르는 말인데 이름값은 그냥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가 불러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호랑이나 독수리로, 라일락으로 자리매김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향 싼 종이에서 향 냄새가 번져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제자리에서 맡은바 소임을 다하며 자신을 꾸준히 갈고 닦아야 하는 일이다. 흔히들 일만시간의 법칙을 이야기 한다. 이름 값을 할 수 있게 되는데 필요한 시간이다. 내 이름자에 맞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 나는 지금 선우 시대를 살며 내 본명을 쓸 수 있는 날이 올 것에 대한 준비를 하는중이다.
화성이 꼭 경기도 화성일 필요는 없다. 이름 값을 하려 노력하는 동안 별나라 화성도 개발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좋은 이름을 짓고 잘 불러 주어야 한다. 이름을 짓는 건 나를 만들어 가는 일 일 수 있다.
좋은 이름을 짓고 이름에 맞춰가기 위한 삶을 살아 가며 삶을 완성한다. 부디 자신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삶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