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전역에서 20번 버스를 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무궁화가 유난히 고와 무작정내렸다.
멀리 고층 아파트들이 보이긴 했지만,
도로 변은 빌딩이 아닌 낮은 건물이 대부분이었고 곳곳에 풀숲이 우거져 있었다.
마치 70년대 서울 변두리 같은 모습이다.
처음 걸어보는 거리건만 익숙한 느낌,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던 이웃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시대에 따라 여행의 풍속도 달라진다.
나도 산이나 바다 같은 자연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유명 관광지 순례도 했으며
맛집을 검색하는 재미에 빠진 적도 있다.
요즘엔 대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중소도시의 소박한 모습에 마음이 끌린다.
아마 젊은 시절의 추억 때문이 아닐까? 화양연화 시절이 그리운 것일 수도 있다.
" 도시와 시골의 중간쯤 되는 도시, 관광지가 아닌 평범한 도시를 구석구석 걸어보는 여행을 하고 싶어" 여행 좋아하는 친구와 몇 번 얘기를 나누웠지만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유명 관광지의 유혹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sns에서 저마다 내는 목소리를 무시하면 나만 소외당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오늘 무작정 내린 것만은 아닌 듯하다.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로망이 참지 못하고 삐죽이 고개를 내민 것이다.
어느새 영글고 있는 벼 이삭이 보인다 .
엊그제 모내기한 여린 벼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본 것만 같은데 조금 있으면 벌판이 황금빛으로 물들게 될 것이다.
길가에 보이는 호박, 깨, 고구마 옥수수 밭 이런 푸성귀들을 밭에서 자세히 보는 건 참 오랜만이다.
이제 이런 것들은 동네 슈퍼에서 본다.
오일장마다 신이 나던 기억도 이젠 아득하다.
퇴근시간에 맞춰 슈퍼에 들르는 게 일상이다
밭 둑에는 칡 넝쿨이 얽혀 있고 예쁜 칡넝쿨 꽃이 피었다.
뿌리는 더 깊게 땅에 박혀 있을 것이다.
강인하게 뻗는 칡뿌리에 비해 꽃은 여리여리하다.
수줍어 고개조차 들지 못한다.
'나 여기 있소' 청초한 도라지 꽃이 칡넝쿨 너머에 있다.
꽃망울은 호야 꽃과 닮았다.
앙다물고 좀체 입을 열지 않을 기세지만 시간에 맡길 일이다.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다
시간은 길과 닮았다.
지나온 흔적으로 남는다.
지금 내가 가고 싶은 곳은 그 시절일 수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 탈출을 꿈꾸던 곳, 그곳으로의 회귀.
한 때는 들판 너머 검푸르게 이어지는 산 능선이를 넘으면 무지개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첩첩 산중에는 꼬불꼬불 길이 나있어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하고
방향을 몰라 제자리에서 맴돌다가 낭떠러지를 만나기도 했지만
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무지개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시절이 좋기만 했다고는 말 못 하겠다.
숨이 멎을 만큼 고단한 시절도 있었고,
세상을 다 얻을듯한 기개를 펼치기도 했으며 나보다 귀한 자식을 품에 안는 기쁨도 누렸다.
기쁨에는 의무와 책임이 따랐다.
때로는 한없이 무거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기꺼이 지어야 하는 짐이었다
그때서야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했다.
길을 걸으며 지나온 시절의 내 모습을 본다
오늘 내가 걸은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이었다
지나간 시간이 품어 온 현재의 내 모습이다
길을 걸으며 비로서 온전히 내모습을 바라 본다
여행은 돌아 올 곳이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