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하얗게 쌓인 마당에 달 빛이 가득했다
엄하게 금지된 밤 외출이었는데 그날은 조금 이상했다
수런수런 분위기가 술렁거렸고 우리에겐 외출용 겉옷이 입혀졌다
달 빛 반사된 눈은 반짝반짝 신비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며 눈에 환호했을 우리들인데
그날은 달랐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눈 쌓인 밤 풍경이 주는 경이로움 때문인지 어른들의 평소와 다른 모습 때문인지
우리는 영문을 모른 채 덩달아 경건해졌다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충주에서 청주로 이사를 오고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고등학교 사택에 살게 되었다
고등학교는 번잡한 시내를 떠나 조용한 시골에 자리 잡은 지 얼마 안 되는 건물이었다
주변은 논과 밭, 동산이 있는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었고
학교 건물만 넓은 운동장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사하던 해 대보름날이었다
그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려 천지가 하얗고 고요했으며
밝은 보름달이 환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눈 빛에 반사된 달빛은 대낮처럼 환했으나 차가웠다
뭔지 모를 신비함이 감싸는 듯했다
밤이 깊었는데 어머니는 우리를 불러 외출복을 입히셨다
장갑까지 끼며 우리 오 남매는 신이 났다
금지되었던 밤 외출이었고 밖엔 눈이 지천이었다
뚱뚱한 둘째 큰엄마도 오셨다
둘째 큰엄마는 정이 많은 분이다
우리를 보면 끌어안고 볼 먼저 비비셨다
얼굴을 찡그리긴 했지만 우리는 그런 둘째 엄마가 싫지 않았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엄격한 어머니를 피할 수 있는 방패가 되어 주셨는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우리를 보며 쉿 손가락을 입에 대는 모습은 처음 보는 낯 선 보습이었다
옷깃을 여미며 우리도 왠지 숙연해지는 기분이었다
달빛이 꽉 찬 마당에 우리를 둘러 세우고 둘째어머니는 팥이 든 바가지를 손에 쥐셨다
"그저 그저 우 씨 집안 무사하게, 그 저 그 저 일 년 내내 건강하게···'
분명한 말보다는 그 저 그 저 가 많이 들어간 축원의 말이었다
요령 부득의 말이었지만 경건했다.
둘째 엄마가 우리를 위해 하는 간절한 행동임을 알 수 있었다
말과 동시에 둘째 큰어머니는 바가지 속에 팥들은 눈 덮인 마당에 뿌렸다
작은 붉은팥이 눈 속에 알알이 밝혔다,
그 작은 팥알이 왜 그리 커 보였는지
그날의 엄숙하던 분위기와 교교 하던 달빛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는 듯하다
경건한 의식을 끝내고 둘째 큰엄마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시루에서 붉은팥 떡을 꺼내셨다
고수레를 하시고 집안 구석구석 떡 조각을 놓으시며 말씀하셨다
"붉은팥이 액을 막아주는 거야, 능들은 보나 마나 건강하고 공부 잘할 거다
이사 오면 이렇게 지신을 밝아야 하는 거야"
이젠 둘째 큰 엄마도 곁에 계시지 않지만 그날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진다
우리가 이만큼 무탈한 것이 둘째 큰엄마의 축원 덕인 듯도 하다
우리 모두 둘째 큰엄마를 좋아했다
잘잘못을 분명하게 가려 조금은 냉정하게 보이는 우리 엄마에 비해
둘째 큰엄마의 품은 늘 따스했다.
엄마의 꾸지람은 한동안 슬펐지만
둘째 큰엄마는 짐짓 큰소리를 내실 때에도 서운하거나 무섭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엄마에게 하는 것처럼 울며불며 치마꼬리에 매달릴 수 있었다
그날 '그 저 그 저'애 들어 있던 진심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 떤 논리적인 말보다 둘째 큰엄마의 진심을 알 수 있었던 말들이다
흰 눈에 박히던 붉은팥처럼 선명한 기억이다
동지 무렵이면 팥떡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날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하던 눈 쌓인 대보름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둘째 작은 어머니의 따스한 품이 그리워진다
요즘엔 떡도 진화하여 오만가지 예쁘고 맛있는 떡들이 있지만
떡집에서 나의 원 픽은 언제나 붉은팥 시루떡이다
특히 찰떡을 좋아한다
팥의 쌉싸름한 기운이 감돌지만
쫄깃한 식감과 팥 고유의 맛의 조화는 먹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묘미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먹어봐야 맛을 안다
가을 철이 되어 햇 팥이 나오면 팥떡을 파는 집을 찾아 나선다
집집마다 맛을 내는 방법이 다르기도 하다
무를 넣어 시원한 맛을 더하는 경우도 있고
호박고지를 넣어 달큼하고 쫄깃한 식감을 내기도 한다
팥떡을 먹으면 비로소 한 해의 마지막을 실감하게 된다
새해를 맞은 준비가 되는 셈이다
동지에 팥 떡을 먹으면 둘째 큰엄마가 생각나고 따스한 품이 그리워진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님의 시구절이 떠오르고
합리적이라던가 이성적 판단으로 세상을 살고 있지 않나 돌아보게 된다.
반듯하고 이성적 합리적인 삶은 조금 노력하면 누구나 가능하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더 뜨거운 삶을 기원해 본다
팥이 액운을 막아주는 기운이 있을 리 없지만 액운을 막아주리라는 믿음은
우리를 따뜻하게 한다
동지에는 팥죽을 먹으며 누군가를 위해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