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讀의 맛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ABI Aug 14. 2021

복자에게

네가보는 것이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늘 생각했으면 한다.


부모의 실패로 제주도 고모댁에 머물게 된 열세 살 이영초롱, 그곳에서 만난 복자. 그 둘은 세월이 흘러 삼십 대를 바라보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라는 무게를 각자 짊어진 채로 다시 만난 두 사람. 


삶은 무엇을 이루었든 그 안에 실패와 낙담을 숨겨두는 것일까. 복자와 영초롱은 각자의 실패를 담고 서로를 마주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나? 어떤 부정도 긍정도 아닌 이야기들이 흘러간다. 드라마틱한 결과도, 재회도 없이. 서로의 환경에서 살아내는 것. 그게 최선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실패가 거듭되더라도 삶 자체가 실패가 되게 하지 말자고 한다. 삶 자체가 실패가 되지 않는 것. 그건 무엇일까. 삶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일까? 


어떤 날은 아무것도 이뤄놓은 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인생이 내 앞에 있다. 실패들로만 얼룩진 삶이 꼭 앞에 놓인 것 같다. 또 어떤 날은 그래도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도 든다. 남들에 비하면 내가 무엇을 이뤘나, 아니다 마음의 안정감이 중요하다. 이런 상반된 마음들이 이리 저리. 


그러다 좋은 책 하나, 마음에 드는 노래,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 잠시의 휴식. 이런 것들만으로도 좋지 않나. 계속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된 것 아닌가. 누군가의 인정, 어떤 이룩이 중요한 것인가. 


올해는 유독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드는 해이다. 그만큼 불안한 나날들도, 또 행복한 나날들도 빈번하다. 




제주에는 아예 그렇게 가여운 애기들을 가리키는 설룬 애기라는 말이 있고 서럽고 불쌍한 엄마를 가리키는 설룬 어멍이라는 말도 있다. 슬픔이 반복되면 그렇게 말로 남는 거야. 



"그래도 제대로 살고 있는 건 맞죠?"

제대로 살고 있느냐고? 나는 여태껏 받아보지 못한 질문이라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눈앞의 사람이 잘 살고 있는가를 판단하기만 했을 뿐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은 드물었다. 



"우리가 지금 삼십 대가 됐잖니. 그런데 인생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어. 그렇지?"

"맞아."

"누구는 그런 말도 한다. 아이를 유산한 나 같은 경우에 산재가 인정될 확률이 높다고. 그 돈으로 건강해져서 얼른 아이 다시 가지라고. 근데 나 있잖아. 다시 건강해진다는 게 뭔지 모르겠어. 다시 그렇게 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우리는 언젠가부터 어른이란 사실 자기 무게도 견디기가 어려워 곧잘 무러 져 내리고 마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나는 제주, 하면 일하는 여자들의 세상으로 읽힌다. 울고 설운 일이 있는 여자들이 뚜벅뚜벅 걸어가는 무한대의 바다가 있는 세상. 그렇게 매번 세상의 시원을 만졌다가 고개를 들고 물밖로 나와 깊은숨을 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 잘되지 않겠니? 



자신의 무례와 무지에 그렇게 무감한 인간들과는 반백년 부대낀 거로 되지 않았겠니. 우리는 우리끼리 만나자. 



네가 보는 것이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늘 생각했으면 한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에 불과하다고 네가 내게 멋진 말을 알려주지 않았니. 그렇다면 법을 통해 볼 수 있는 인간의 면면도 최소한에 불과한 거야. 회사는 자본이니까 네가 말한 대로 흘러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나란 사람도 그렇게 흘러간다고 네가 말할 수 있니?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실패는 아프게도 계속되겠지만 그것이 삶 자체의 실패가 되게는 하지 말자고.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선언보다 필요한 것은 그조차도 용인하면서 계속되는 삶이라고 다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그렇듯 버텨내는 자들에게 기꺼이 복을 약속하지만 소설은 무엇도 약속할 수 없어 이렇듯 길고 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내게 무해한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