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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세곡 Mar 17. 2024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지는 영화 - '파묘' 리뷰

<한국영화> '파묘' 스포 없는 리뷰

90년대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집으로 향하는 나를 친구가 낚아채듯이 붙들었다. 오늘 자기 집에 꼭 같이 가야 한단다. 끝내주는 영화를 구했다면서.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충격적인 영화는 처음이었다.


  친구네 집에서 본 영화는 그 유명한 ‘링’이었다. 이제는 전설의 고향 취급당하는 고전이 되어버렸지만, 내 인생 첫 공포영화였다. 더구나 나는 그 영화에 대한 어떤 사전지식도 없이 본 것이었다. 방심하는 중에 우물 속에서 나오는 사다코의 모습을 보면서 솔직히 기절하는 줄 알았다. 친구가 옆에 있으니 쪽팔려 티는 안 냈지만.


  겁이 많은 나에게 정말 쥐약이 따로 없었다. 특정 장면의 잔상은 너무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다른 어떤 생각으로도 덮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고생한 나는 그 뒤로 공포영화 특히 오컬트 장르물은 절대로 보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재미있다는 입소문이 들려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특정 장르를 보지 못한다는 건 썩 좋은 일이 아니다. 해당 장르에서도 얼마든지 명작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천만을 향해 무섭게 달려가고 있는 ‘파묘’ 또한 같은 이유에서 처음에는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기까지 무척이나 망설였다.


  용기를 얻게 해 준 것은 뜻밖에도 주연 배우 최민식의 인터뷰 내용 때문이었다. 유퀴즈에 출연한 그는 이번 작품 파묘가 데뷔 35년 만에 첫 오컬트 영화라고 했다. 심지어 평소에도 무서운 영화는 거의 보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그가 출연을 결심한 작품이라면 뭔가 있겠지 싶었다.


  심지어 국내 유일무이한 오컬트 전문 감독이라 불리는 장재현 감독의 작품이니 관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알아주지 않는 장르를 묵묵히 말 그대로 파묘해 온 그가 아니던가. 그동안 겁이 많아 다가가지 못했던 장르의 벽을 부수고 마침내 나는 티켓팅을 해내고야 말았다.


  영화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감이 충분했고, 공포스러운 연출 장면도 나왔지만 다행히 눈 감고 고개 숙일 정도는 아니었다. 최민식이 관록 있는 대배우답게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었고, 김고은과 이도현이 신세대 무속인으로서 신들린 듯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감초 같은 유해진의 연기는 영화가 너무 무겁게만 흘러가지 않도록 템포를 잘 조절해 주었다.


  무엇보다 근래 본 영화 중에서 시나리오의 힘을 가장 강하게 느낀 영화였다. 풍수지리와 무속신앙을 소재로 하면서 끝부분에 가면 역사 이야기로까지 뻗어나가는 전개는 단순히 오컬트를 넘어 서스펜스도 선사해 준다. 다만, 이 부분에서 호불호가 명확히 갈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우 호다. 서사의 전환이 억지스럽다거나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쉬운 점은 오히려 영화 외적인 부분에 있었다. 역사적인 이슈가 영화 속에서 그리 높지 않은 비중으로 다뤄지는데 이것을 가지고 정치적인 대립각을 세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각자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험한 생각과 감정들은 이제 제발 파내고, 영화는 그냥 영화로서 즐겁게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는 보고 난 뒤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지는 영화다. 이번에 본 ‘파묘’가 그랬다.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가운데 반드시 파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정말 우리 일상을 험하게 위협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보는 시간이었다. 혹시 아직 안 보셨다면, 곧 천만 관객을 돌파하게 될 영화 ‘파묘’를 이번 주말에 꼭 보시길 적극 추천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이미지 검색 "파묘"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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