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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세곡 Nov 07. 2024

유난히 짧아진 가을은 자연이 보내는 경고장이다.

집 밖을 나서는데 날이 제법 차다. 어제보다 옷을 한 겹 더 챙겨 입었는데 쌀쌀한 바람이 목을 휘감는다. 가벼운 목도리도 하고 나올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든다. 목을 잔뜩 움츠렸다. 


안 그래도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추워진다더니 진짜 그렇다. 여름이 너무 오래 지속된 탓에 이번 가을은 진짜 잠깐 왔다 가려나보다. 예상 못한 바는 아니지만, 가을을 이렇게 빨리 보내려니 아쉽다. 


지나간 여름이 유난히도 더웠던 만큼, 기다렸던 가을이었다. 어서 가을이 와주기를 바라는 마음. 여름 내내 든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솔직히 너무 더워서 가을이고 뭐고 얼음 가득한 겨울 왕국으로 순간 이동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가을을 제대로 보내지 않고 맞는 겨울은 좀 별로다. 봄과 마찬가지로 가을도  충분하게 머물러 주어야 마땅한 계절이다. 여름과 겨울만 일 년 내내 지속된다고 상상을 잠시 해보니 그게 바로 지옥이다. 극과 극을 반복하는 아주 극단적인 기후의 나라였다면 아마도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 상태는 지금 보다 훨씬 더 불안정하고 난폭했을지도 모른다.


양 극단의 여름과 겨울 그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봄과 가을은 우리의 정서를 안정시켜 준다. 몸과 마음이 각각의 계절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단순히 더위와 추위 사이를 메꾸는 정도가 아닌 것이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자연도 인간도 탈이 없다.  


게다가 심심하지 말라는 듯 그들 고유의 아름다움을 뽐내주는 친절까지 베푼다. 봄에는 생명 태동의 신비로움이 있고 가을은 열매의 풍성함이 있다. 특히 가을은 색깔에 있어서 미친 미장센을 보여준다. 울긋불긋 색색이 물들어 가는 보는 재미는 덤이다.  


더운 여름을 간신히 지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을을 향한 기대감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봄과 가을은 나머지 두 계절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우리 일상을 끌어안아준다. 한 계절과 이별하고 다음 계절을 만날 채비를 하고 있노라면 같은 하루도 조금 더 풍성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올해는 영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역대급으로 무덥고 길었던 여름은 우리의 지친 숨을 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덕분에 부쩍 짧아진 가을을 매일 아쉬움 가운데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추워진 공기는 어서 겨울을 맞이하라고 채 촉하고 있다. 


꽃피는 봄도 좋아하지만, 낙엽 지는 가을도 못지않게 좋아하는 나에게는 꽤 치명적이다. 선로에 문제가 생겨 연착된 기차처럼, 가을역에는 스치듯 정차했다 바로 다시 출발하는 것 같다. 이미 너무 늦어버렸기에 겨울역을 향해 최대한 속도를 높이면서 가고 있다.


오늘부터 며칠 동안 예년보다 훨씬 더 추워진다고 한다. 서울 기준 오늘 최저 기온은 첫 영하를 장식할 듯하다. 나만 가을에 미련을 두고 붙잡고 있나 보다. 가을역은 이미 지나친 지 오래고 겨울역이 코 앞이다. 


너무나도 짧게 지나쳐버린 가을. 그 정취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겨울에 들어서려니 뭔가 허전하다. 길거리 이곳저곳을 바람 따라 힘차게 몰려다니는 낙엽들. 초록끼가 채 빠지지 않은 잎들이 많이 보인다. 매년 고약한 냄새로 우리를 괴롭혔던 은행열매 지뢰밭도 몇 군데 보이지 않는다. 


폭염, 폭설, 폭우 만이 이상 기후가 아니다. 변화하는 계절의 모습을 조금 더 세심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매년 맞이했던 계절의 풍경들이 점점 희미해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별 노력 없이 누렸던 계절조차 이제는 인류가 풀어야 할 과제처럼 주어졌다.


당연한 게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더 깊이 직면하라고 우리를 재촉한다. 가을의 시간이 즐어가고 있는 건 다시 한번 자연이 인간을 향해 던지는 엄중한 경고다. 선명하게 물들지 못하고 휘날리는 낙엽들. 바스락 거리는 이파리들이 그렇게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다.





*Photo by Adam Bixb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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