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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을 깬 날, 마음이 채워졌다

by 천세곡

현재 백수인 나. 내게 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아내에게 몽땅 갖다 바쳤다. 심리상담을 받고 있는 아내의 금전적인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울과 불안증으로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는 중이다. 퇴사 직전에 다니기 시작해 거의 2년이 다 되어 가는 상황. 다행히 증상에 호전이 있어 약물치료만 유지하고 상담은 종결하였다.


그런데 의외의 변수가 생겼으니 바로 아내다. 나와 마찬가지로 아내 역시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내가 나를 돌보는 데 집중하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거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내의 배려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 쉬면서 치료에 전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도울 차례가 왔다.


아내에게 상담을 받아보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류의 이야기는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자칫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전보다는 나아졌으나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는 상담이나 정신과 치료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마음먹기도 힘들고 발걸음을 옮기는 건 더욱 힘이 든다.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고맙게도 아내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병원 문을 두드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아내는 10회기 상담을 받기로 했다. 유료로 받는 전문 상담은 처음인 만큼 기본 회차만 일단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 이후 상담을 더 이어갈지 여부는 아내 혹은 상담 선생님과 상의 후 결정하면 된다.


일단 시작해 준 것만으로 고맙고 대견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다. 추가 상담으로 이어질 경우 발생하게 될 적지 않은 상담 비용이다. 아내의 외벌이로 살고 있는 지금, 추가적인 고정 지출이 생겨나는 건 아무래도 큰 부담이다.


언제 다시 일하냐고 누가 물어보면 백수가 체질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던 나다. 처음으로 일하고 있지 않은 내가 원망스러웠다. 어떻게든 아내가 돈 걱정 없이 상담을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당장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는 상황.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는 결심했다. 내 앞으로 된 보험을 하나 해약하기로 말이다.


들어놓은 보험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해약할 보험을 결정하는 데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상해보험이 눈에 딱 들어왔기 때문이다. 실비보험이 있으니 이거다 싶었다.


더구나 남들보다 체력이 약하고 피지컬이 미약한 나는 몸 쓰는 일도 무척 싫어한다. 앞으로도 육체노동을 할 가능성은 낮다. 물론,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니 드는 게 보험이기는 하다. 그런데 하나둘 따지다 보면 불필요한 보험이 또 어디 있을까.


어플로 해지를 하고 나니 만 하루 만에 입금이 되었다. 진짜 오랜만에 백만 원 단위의 금액이 나의 통장에 들어왔다. 퇴직금 이후 처음이다. 들어온 돈을 고스란히 아내의 통장으로 입금했다.


입금된 내역을 확인한 아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표정이 밝아진다. 아깝게 왜 그랬냐고 말하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엄청 큰 금액은 아니지만 부담감을 덜어준 게 분명하다.


소위 해지 방어 전화가 올 법도 한데 보험회사 콜센터도 잠잠하다. 모든 과정이 수월하고 거침없이 진행되는 걸 보니 이러려고 모아놓았던 돈이었나 보다.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는 많은 금액을 받았다.


깰 수 있는 보험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해보험을 해지하고 나니 남은 건 필수적인 보험뿐이다. 딱 필요한 것만 남겨둔 것 같아 오히려 홀가분하다. 하나를 비웠더니 오히려 채워지는 느낌이다.


나의 상담에서 아내의 상담으로 전환되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상담을 통해 아내가 쉼과 응원을 얻기를 바란다.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지치고 힘든 스스로를 힘껏 안아주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진출처: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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