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년 Feb 09. 2022

‘그냥 회사원’이 아직도 가끔은 부럽다

꿈은 다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약해서 그나마 체력소모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공부였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부는 곧잘 했다. 공부를 잘 했다기 보단, 시험 성적이 좋았다. 희한하게 경제적으로 좀 넉넉치 않은 경우에, 또 학원 안 다녀도 돼~ 공부 너무 열심히 하지마. 라고 말하는 부모 밑에는 성적 욕심 많은 아이가 자란다. 그리고 부모님께 느끼는 감사함과 죄책감을 내 노력으로 해결이 안되는 그 병의 완치보다는 성적표로 갚으려고 했던 것 같다. 내가 남들보다 성적 잘 받는것에 유독 욕심이 많기도 했다. 또한 부모님도 내가 성적을 잘 받아오면 자랑스러워하시고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쭉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고 나름 좋은 대학에도 들어갔다. 당연히 난 평범한 회사원이 꿈이었고, 특별히 원하는 분야가 없어서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평범하게 대외활동을 하고, 크게 특출나지도, 크게 부족하지도 않은 스펙을 쌓으며 대학생활을 보냈다.

대학 생활 중에도 내 병이 나를 발목 잡을뻔 한 적이 있지만 아슬아슬하게 잘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무리해서 밤만 더 새지 않으면 괜찮을거라고 여기며…….



졸업과 동시에 원하던 회사에 채용형 인턴으로 합격했고, 심지어 원하던 부서로 배정을 받아서  이제 힘든 것은  끝난 줄로만 알았다.

물론 회사 다니는게 거기서 거기고 부당한 지시야 뭐, 나만 받는 것도 아닐테고, 모든 사회초년생들에게 첫 회사 생활은 말도 못할 힘든 일 투성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3개월도 못 채우고 퇴사하게 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우리 부서에는 회사에서 성격 안 좋기로 유명한 3대 여자 대리 중 2명이 있었다. 자세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우리 국을 담당하시는 유일한 여자 국장님을 보며 마음속으로 저 분은 정말 능력이 좋으셨나보다. 생각했는데.. 나에게 본인의 서울대 박사 학위를 위한 논문 번역을 시키셨다. 금요일에 그걸 주시며 월요일까지 해오라고 하시는 등.. 그렇지만 이런 사건들이 주된 이유는 당연히 아니다.


일을 한지 두 달이 채 안 되었을 때다. 전조 증상인지 모르겠지만, 매주 꼭 한 두 번은 오한이 들었다. 단순히 회사 생활의 부담감과 스트레스라고만 생각하고 넘겼다.

그러다 인천에서 연수를 받던 중 밤새 토를 미친듯이 하고 배가 너무 아팠다. 정말 연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고통이 어찌나 심했던지, 눈 앞이 안 보였다. 거의 기다시피해서 인천에서 서울역까지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바닥에 앉아버리니, 한 아주머니께서 자리를 내어주셨다. ktx를 타고 겨우 대구의 주치의가 계신 병원으로 왔다.


단순한 충수염인줄 알았는데 혈소판 수치가 10년만에 갑자기 너무 떨어졌단다. 쇼크가 올 정도의 저혈압에, 패혈증이라 급히 수술 해야하는데 부모님께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단다. 간 수치는 비정상적으로 높았고,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검사 결과 상 c형 간염 의심이 되며, 루푸스도 의심된다며 골수 검사까지 권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혈소판 감소증의 재발은 아닌데, 그 당시엔 혈소판 수치가 다시 떨어졌다는 것만으로 우리 가족에겐 큰 충격이었다.

비장도 제거해서 이제 할 수 있는게 없는데..뭘 더 떼어내야 하고 내 몸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남들처럼 평범한 몸이 되는걸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던 그 시기에 나는 내 병실에 들어오는 학생 간호사들이 너무 귀찮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동생이 간호대 학생이기도 했고 실습을 위해 해야만 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지금 나는 이렇게 누워서 일도 못하고..어떻게 들어간 회사인데 퇴사를 생각해야하고, 정말 모든 것이 억울해 죽겠는데.. 왜 혈압은 저렇게 많이 재야하는거지? 나한테 왜 이렇게 귀찮게 굴지? 내 몸 그만 좀 건드리면 안되나? 하는 못된 생각을 했다.


나는 하나의 병으로도 버거웠고, 그 병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은지 겨우 10년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저 우주의 먼지쯤 되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겠다고 이제 막 발을 내딛었을 뿐인데.. 신이 실제로 있다면 그 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너 어디 평범하게 남이 하는거 다 누리고 살려고 그래? 맛좀봐라’ 하는걸로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검사 결과가 끝까지 나오고 나서 퇴사를 결정하는게 좋았을텐데.. 그 때 내가 느끼는 내 몸 상태는 너무 좋지 않았고, 내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이 다행이면서도, 회사에 돌아가서 그 부당한 업무 지시를 다시 받을 생각을 하면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어. 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나에게 선택지는 퇴사 밖에 없었다. 집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회사로 돌아가면, 내가 운 나쁘게 다시 아파서 고생하거나 죽어도 그건 내 책임이다.’

나는 아직도 의사 선생님과 대화하던 부모님의 넋 나간 표정과 수술 후 회복 중에 본 남자친구의 안도하는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질병으로 인한 휴직이고 나발이고 그냥 여기서 그만두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나중에 나온 검사 결과에 의하면 c형간염도, 루푸스도 아니었지만 그걸 보고도.. 이쯤이면 이 길은 너의 길이 아니라며 포기하라는 뜻으로 덤덤히 받아들였다.


아파서 괴로울때도, 그로 인해 마음까지 아프거나 나에게 너무 힘든일이 생겼을때마다 참지 못하고 내 곁에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 죽고 싶어 라고 내뱉었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도 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만 두었고 내 친구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요가강사가 되었다고 하면 다들 왜? 네가? 라는 반응이 먼저이다. 뭐..그들의 반응도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왜 그 많은 선택지 중에 요가강사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는 언젠가 쓰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내가 가야할 길이 어딘지 모르겠다. 심지어 그렇게 겪고도 나인투식스 굴레에 나를 다시 가두려고 공무원 준비를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처럼 무식하게 공부를 하거나 나 자신을 몰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으면 쉰다. 진심으로 안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눈치 덜 보고 정당하게 쉬고 싶어서 공무원 준비를 시작한것인가 싶기도 하다. 희박한 확률이라 해도, 손이 미끄러지고 찍신이 강림해서 혹시라도 합격한다면 나에겐 그게 더 문제가 될 것을 안다.

그리고 오늘도 다짐한다. 내일부터 공부 열심히 해야지!

작가의 이전글 ITP 투병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