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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이집사 Aug 23. 2023

닻 내림 효과

크게 부르거나 의심하거나

수박 먹은 접시를 부엌에 안 내놨다고 또 한소리 한다. 당신도 그러면서 애들한테 방 어지럽히지 말라냐며 쏘아댄다. 가뜩이나 여기저기 고양이 털 때문에 죽겠는데, 둘이 그냥 도매금으로 넘겨버릴까 투덜대며 아내는 접시를 들고나간다.  


나를 고양이와 동급으로 보다니, 그래도 집안의 가장인데 같이 팔아넘긴다니. 에이 이놈의 자식! 거실에서 어슬렁거리는 깜이를 발로 툭 밀어버렸다.


도매금 말을 들으니 유튜브에서 봤던 '짤방'이 떠올랐다. 부부들이 수다를 떨다가 느닷없이 홈쇼핑 진행자 흉내를 내었다. 어떤 여자 출연자가 자기 남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다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어때요 제 남편? 그래도 맘에 안 드세요? 비싼가요? 그럼 옆집 남편과 함께 1+1로 드리겠습니다"


세상 원수 같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편을 팔아치워버리고 싶었나 보다. 그래도 시원찮은지 옆에 있던 다른 출연자의 남편까지 묶어서 넘기겠다는 아내의 말에 모두가 뒤로 넘어갔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지목당한 그 남편은 무슨 기분이었을까? 아내의 재치 있는 입담이었지만 '의문의 1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 남편들은 다 정신 차려야겠다.


홈쇼핑에서 꽤 재미를 본 '하나 사면 하나 더 줄게' 전략은 이제 동네 구멍가게부터 백화점까지 흔하다.


묶어 사면 더 주는 곳은 편의점이 최강이다. 1,000원에서 1,300원, 어느새 1,500원에서 다시 1,700원까지 오른 과자 가격을 보면 도저히 낱개로 살 엄두가 안 난다. 제 돈 주고 사면 괜히 손해 보는 느낌이다. 그 상품이 필요 없는 사람은 한 개 사면 열 개를 준다 해도 눈에 안 들어온다. 그러나 그걸 사야 한다면 2+1이나 1+1인 게 낫다. 덤으로 한 개 더 준다는 데 마다할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원가 기준으로만 보면 묶음으로 사는 게 싸다. 왜 이렇게 파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건 다음 문제이다.


할인의 원조는 1,000원이면 950원, 10,000원이면 9,000원 식으로 원가에서 얼마만큼 깎아주는 방법이다. 에누리, 덤 문화가 유독 강한 우리나라 정서와도 잘 맞는다.


물론 깎아주는 정도가 2+1이나 1+1을 넘는 경우도 많다. 어떤 화장품 매장 유리창문에 1+2가 붙어 있는 것도 봤다. 도대체 뭔 소릴까? 13만 원짜리 아동 점퍼를 2만 원에 판다던가, 3만 원짜리 생선회 세트를 만 원에 가져가라는 등 유행을 타는 상품이거나 신선 식품의 경우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신상 제품 가격을 다짜고짜 50%부터 80~90%씩 내리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이럴 때는 "적정 원가가 도대체 얼마지?", "그렇게 팔면 남긴 남을까?" 같은 생각이 앞선다.


가격 전략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 그렇지만 제품 할인에서 사람 마음을 교묘히 흔들어놓는 원리는 읽힌다. 바로 기저 효과(anchoring effect)다.


기저(基底) 효과란, 기준 시점의 위치에 따라 실제보다 커 보이거나 작아 보이는 현상이다. 평소 지닌 만성 질환이 기저 질환이다. 사실 기저보다 닻 내림이라는 괜찮은 옮김 말이 있다. anchor가 '닻', '닻을 내리다'라는 뜻이니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배가 닻을 내리고 멈춘  정박(渟泊)이어서 '정박 효과'라고도 한다. (* 아래부터는 '닻 내림'으로 부름)



닻을 내리면 해안에서나 바다 한가운데서 배는 멀리 흘러가지 않는다. 닻을 내린 그 지점이 바로 기준이 된다. 닻을 내린 배가 움직이지 않듯, 초기 제시 값이 선입관으로 작용하여 뒤따르는 생각과 판단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


한마디로 닻 내림 효과란 붙박이처럼 딱 고정되어, 무언가를 판단하고 결정할 때 심리적 기준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원래 가격에서 많이 깎을수록 매력적으로 보인다. 원가가 소비자를 속이기 위한 뻥튀기 가격일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왜 그렇게 보이냐고?


인간의 성향이 본래 그렇기 때문이다. 물론 일주일에 서너 번 직접 장을 보는 주부나, 온라인상에서 가격 비교에 숙한 소비자라면 다양한 상품에 대한 적정 가격을 알고 있어서 닻 내림 전략이 잘 안 먹힌다.


그래서 판매자나 마케터는 소비자가 즉각적으로 셈하거나 따져보기 어렵도록 할인의 메커니즘을 죽게 꼬아 놓는다. 결합 상품 할인, 쿠폰과 카드 복합 할인, 조건부 할인, 제품 용량이나 크기 변경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더해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판매자들도 너도나도 할인을 하다 보니 365일 할인이다. 소비자는 할인이 할인을 불러오는 '할인 인플레이션 증후군'에 걸려, 이제 웬만한 할인 행사에는 별 반응을 안 보인다.


사실 닻 내림 효과는 정보가 대등하지 않을 때 제대로 나타난다. 내가 모르는 걸 상대방이 알고 있거나, 내가 정보를 잘못 알고 있을 때 상대방이 내리는 닻에 꼼짝없이 눌린다.


생사를 결정짓는 큰 수술을 앞둔 환자의 가족들에게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라던가, 말기 암 진단을 내릴 때 "길어봐야..."라는 식으로 말하곤 한다. 최악의 상황을 환자와 가족의 머릿속에 박아놓기 위함이다. 그렇게 말하는 의사도 마음은 편치 않겠으나 미리 선수를 쳐야 진짜 그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책임을 피한다. 행여 환자가 극적으로 회복되거나 하면 자신의 공(功)으로 돌릴 여지도 있다.


외국인을 등쳐먹는 일부 상인들도 닻 내림의 선수이다. 베이징 짝퉁시장에서 산 카드지갑 몇 개가 지금도 집에 굴러 다닌다. 십 년이 넘은 지난 지금도 쓸만하다. 내가 낸 돈이 20위안, 우리 돈 3,500원 정도였으니 95% 싸게 산 셈이다. 300위안을 부르는 아줌마에 나는 30위안을 부르고 시작하였다. 한국에서 출장온 직원들을 데리고 시장 바닥을 지겹도록 들락날락거린 나였다. 이런 명품 짝퉁 지갑은 이삼십 위안밖에 안 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 딸도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닻 내림을 안다. 뭘 하고 싶으면 꼭 크고 비싼 거부터 툭 던진다. "엄마, 비행기 타고 싶어", "롯데세계 언제 갈 거야?", "아빠, 오늘 통닭 먹으면 안 돼?"라며 조른다. 그러면 차를 타고 당일 여행을 가거나 월미도 공원을 가며, 피자라도 사주게 된다. 초등 저학년까진 울며불며하면 들어주곤 했지만, 이젠 어림없단 걸 깨달은 듯하다. 나름의 협상법을 딸은 터득한 셈이다.


닻 내림에 지나치게 눌리면 현명하고 유연한 사고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면 앞이 검은색으로만 보인다. 검정 선글라스가 닻으로 작용한다. 이놈은 어떻고 저놈은 어떻고 직원에 대한 험담 또한 닻이다. 같이 일한 적도 없으면서 '카더라 통신'만으로 자기의 주관이나 선입견에 얽매여 동료를 좋지 않게 본다. 이렇게 사람이나 현상에 대해 마음속에 지닌 생각은 올바른 인식을 방해한다. 옷이 날개다라는 속담처럼 꾀죄죄한 옷차림을 한 사람도 뭔가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인상을 준다. 실제 그렇지 않음에도. '다시 보자 조명발, 속지 말자 화장발'도 닻으로 위장한 조명과 화장을 경계하자는 말이겠다.


정책 수립의 근거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정부나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수많은 연구용역도 당초 계획과 결과가 사뭇 다르다. 거창한 착수보고회 자리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 공언해도, 중간보고회와 최종보고회를 거치면서 계획이 슬그머니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연구 수행기관이나 인력을 탓할 게 아니다. 개인은 안 그런가? 자기가 계획하고 마음먹은 대로 척척해내면 지구를 몇 번 구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계획은 '이론적으로' 가능한 최상의 시나리오일 뿐이다.


결국 닻은 걷어 올릴 여지가 있어야 한다. 사실 십계명조차도 하늘에서 떨어진 그 무엇이 아니다. 신줏단지 모시듯 벌벌 떨지 말자. 반드시 구약성서의 십계명에 갇혀있을 이유가 없다. 높이 걸려 있다면 끌어내리고 또 끌어내리면 된다.


닻 내림도 십계명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기준이 아니다. 언제든 바뀔 수 있고 필요하면 바꿔야 한다. 관심이 없거나 정보가 부족한 소비자는 이른바 호갱으로 전락한다. 상대가 닻을 내린지도 모른 채.


가격이 얼마든 난 상관없다고? 뭐든 '플렉스' 가능하다고? 다 아니까 속아준다고? 그럼 닻 내림에는 신경 꺼도 된다. Pass!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만그만한 소비자이다. 되도록 한 푼이라도 아끼려 하며, 제품과 서비스가 얼마인지 따진다. 가격을 신경 쓴다면 우리 주위를 맴도는 닻 내림의 덫을 유심히 살펴봐야겠다.




이것만 알자!


- 선택지는 다양하다.

- 초기 값, 첫 제안에 혹하지 말자.

- 닻 내림은 언터쳐블 한 그 무엇이 아니다.

- 상대방과 협상을 한다면 일단 크게 많이 불러라.

- 현명한 소비자라면 제품과 서비스의 원가를 의심하고 따져봐라.

- 가격보다 다른 가치를 더 중시한다고? 그러면 닻 내림에 신경 끄고, 딴 데 시간을 써라.

- 계획은 계획일 뿐, 결과는 계획에 미치지 못한다. 계획대로 살았다면 누구나 지구를 구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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