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보다 편함이 먼저다. 낯섬보다 익숙함에 끌린다. 이리저리 복잡하게 따지느니,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첫 느낌을 받아들이고 만다.
인간의 인지력은 구두쇠이다. 웬만하면 쉽게 가려하고 숨겨진 분석력을 꺼내 들지 않는다. 자신의 인지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편견이나 오류를 바꾸려면 지금의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어중간하게 부정해서는 어림없다. 적극적이고 처절할 만큼 자신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을 뒤돌아보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을 나무란다. "야 이놈아, 게임 좀 그만하고 공부 좀 해"라며 자식을 다그치면서도 자신은 허구한 날 거실에서 TV를 보고 앉아 있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며 배운다고 했다. "라떼는 말이야. 까라면 까고 하라면 했어, 그 정도도 못 참냐?"라면서 아래 직원을 윽박지른다. '개저씨', '꼰대' 소리를 듣는 이유이다.
뭐 대단한 자리도 아니면서 보잘것없는 능력으로 신세대들에게 과거의 방식과 사고를 강요하는 직장 내 중년들이 적지 않다. 기업이나 기관마다 갖가지 규정 등으로 이런 갑질을 막고 있으나 잊을만하면 일이 터진다.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본전 생각이 난다고? 시대가 변해도 한참 변했다.
통신과 인터넷의 발달로 사무자동화가 엄청나게 진전되고 협업 시스템이 점점 효율화되어가는 지금, 신세대들의 업무 처리량은 구세대 시대가 했던 양보다 결코 적지 않다. 사고방식 자체도 이삼십 대와 오십 대가 다르다. 줄자를 대고 기안문 만들어 문서 올렸던 세대가 지금보다 뭐 얼마나 일을 하였을까? 스펙도 밀리지 않고 진취감도 있으나 구조적으로 인사 적체가 심해 좌절하는 아랫 직원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어제의 기준은 오늘과 다르고, 나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은 아닐 텐데 자꾸만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한다.
한국에서는 잘만 처리해 주던데 중국에서는 왜 안 되냐고 답답해한다. 한국 관공서에서는 무슨 서류 하나 떼는데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중국에서 일하는 한국인, 한국에서 일하는 중국인, 모두 자신의 눈으로만 본다.
근무 강도나 복무규정이 민간보다 느슨한 공공기관에서 일하면서, 조직 문화가 답답하다더니 성과에 대한 보상이 적다느니 푸념한다. 그런 직원은 판교 IT 밸리로 가서 극한 경쟁에 동참해 봄이 좋을지도 모른다.
물론 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마음먹은 데로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억울함도 답답함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렇지만 대안이나 노력 없이 넋두리만 늘어놓은 들 무슨 소용일까? 세상이 벽이라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가 벽이 되도록 마음먹어 보면 어떨까? 아니면 세상과 사람과 현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바꾸어도 좋겠다. 어쨌거나 '자기 혁명'이 필요한 이유이다.
"너네가 뭔데 내 한계를 정하냐. 내가 할 수 있으면 하는 거지!"
48kg, 52kg 두 체급에서 레슬링 그랜드슬램(아시아 선수권, 세계 선수권, 아시안 게임, 올림픽)을 달성한 심권호 선수의 말이다.
얼마 전까지 예능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내밀었는데 여러 가지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체육인으로서는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다. 1년 남짓한 사이 48kg에서 52kg를 찌우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산에서 그냥 굴러 떨어져 죽거나, 손가락을 다 부러뜨리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 그냥 몸무게를 불리는 게 아니라 근력과 근육량을 조절하면서 부작용도 없도록 하는 게 그토록 어려웠단 의미다.
맞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다. 가장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도 나고.
사람은 혼자 못 산다. 공감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에게 보이는 관심은 여전히 한계가 있다. 내가 바뀌는 게 먼저다. 그럼에도 나에 대해 진정성 없이 툭 던지는 타인의 부정적 평가를 십계명처럼 여긴다. "그런가 보구나, 안 될 거야", "내가 뭔 능력이... 불가능할 거야" 하면서 괜스레 주눅이 들어 스스로 고꾸라지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못 믿는데, 남이 뭘 알아주길 바랄까. 스스로를 다잡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