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언니가 어린 동생을 데리고 신나게 놀고 있습니다. 땅을 파던 손은 흙먼지로 가득하고, 면바지는 흙구덩이에 굴러 여간 지저분한 게 아닙니다. 마침, 엄마가 아이들을 발견하곤 후다닥 뛰어갑니다.
“더러우니 손 털어. 거 참 쓸데없다.”
쓸데없다는 말이 가슴에 꽂힙니다. 나를 사소하게, 쪼그라들게 만듭니다.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요.’
지금 하는 일은 쓸데 있는지, 동료에게 도움은 되는지, 가족은 또 나를 쓸데없다고 느끼는 건 아닌지, 자꾸 따지게 됩니다. 살면서 쓸데없다는 말을 제법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늘 ‘주목받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상황 속에 존재했습니다. 세상에 ‘쓸데 있어야’ 비로소 안식을 찾았고 안도했습니다. 그렇게 커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 탓도 아닙니다.
흙 놀이를 하지 않은 아이가 흙의 고마움을 어떻게 알까요. 흙 놀이 없이, 흙과 아이는 서로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생명을 존중할 수 있을까요. 딱딱한 문명은 돈이 되지 않는 하나하나의 생명, 심지어 사람조차 쓸데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자원과 이용의 관점으로 쓸모없으면 버리고 또 폐기 처분합니다. 쓸데없이 구불구불한 강은 직선으로 개선하고, 쓸데없는 산양 서식지 대신에 케이블카를 놓고, 쓸데없는 산호 군락지는 걷어내 크루즈선을 띄웁니다. 갈팡질팡 흔들리는 나의 마음을 잘못되었다고 질타합니다. 의미 없이 놀고 있으면 안 됩니다. 불안하니까요.
오늘은 시인 윤동주처럼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나에겐 한없이 그리운 이름들, ‘사소한 것’ ‘쓸데없는 것’을 불러보며 그들을 닮아갑니다.
‘갈매기섬, 파도, 고등어, 미역, 시장, 할머니’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는 나를 둘러싼 쓸데없는 이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곳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고 나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곳에 있을 때 비로소 턱 막힌 숨을 쉴 수 있습니다. 살아 있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나는, 우리는 훌륭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아무거나, 쓸데없어도 됩니다.
쓸데없는 것을 굳이 이름 부르는 우리의 일상은 하루하루 ‘혁명’의 과정입니다. 나의 하루, 친구, 놀이를 쓸데없다고 규정지어 버리는 어떠한 힘, 권력, 절대자 그리고 당신을 거부합니다. 아이는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봅니다. 온 생명이 어떻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자리를 잡는지, 경이롭습니다. 쓸데없는 곳에서 생명의 질서를 알아차립니다. 우리는 ‘그 질서를 깨뜨리는 자’에 저항합니다.
쓸데없어도 됩니다. 놀아도 됩니다.
나는 오늘, 태평양 물결을 새긴 고등어 되기 놀이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두 번째 삶은 방파제면 좋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아름답고 쓸데없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