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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정 Jan 23. 2022

풍경 너머의 사람3

밤에 한 목욕


“사람들이 안에서 자고 있을 거예요.”

“방으로 조용히 들어갈게요. 고마워요.”


마르코는 내게 방을 안내해주고 다시 프런트로 돌아갔다. 문을 여니, 어둠 속에서 먼저 도착한 투숙객들이 깊은 잠에 빠져 규칙적으로 날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전부 여행자인 듯했다. 내가 예약한 방은 여성 전용 4인 도미토리였는데, 오직 오른편에 위치한 이층 침대 하나만이 비어있었다. 거기가 내 자리였다. 나는 행거에 겉옷을 벗어 걸어 놓고, 바닥에서 조심스럽게 트렁크를 열어 세면도구를 챙겼다. 늦은 시간이어서 바로 잠들고 싶었지만, 그전에 먼저 피로에 지친 몸을 뜨거운 물에 씻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마르코가 챙겨준  슬리퍼로 신을 갈아 신고 수건을 마저 한 장 챙겨, 복도에 있는 욕실로 갔다.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공간도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일례로, 몇 년 전에 스웨덴 공항에서 내려 화장실을 들렀다가 놀란 적이 있다. 그 화장실에는 성별 구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별뿐만 아니라 성 정체성, 연령, 인종, 장애 여부를 막론한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일렬로 줄을 섰고, 화장실의 모든 칸은 각각 1인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칸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변기와 세면대, 장애인을 위한 바(bar)를 비롯해서 그 공간의 이용자가 모든 것을 편하게 해결하고 나올 수 있도록 내부 공간이 설계되어있었다. 처음에는 오직 공항만 특수하게 이러한 형태의 화장실을 설치해 놓은 것인가 생각했지만, 이후 미술관에 가서도 같은 형식의 화장실을 보고 나서 더 놀랐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그곳에서 줄 선 사람 중 놀라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욕실에 주목했다. 호스텔의 공용 욕실은 바닥에 미색의 네모난 타일들이 깔려 있었고, 벽면도 그보다 조금 더 밝은 톤의 타일로 반쯤 뒤덮여 있었다. 벽  중간에는 기하학적인 패턴이 새겨진 얇은 장식 띠가 둘러져 있었다. 창문은 나무틀로 되어 있는 세로로 길쭉한 모양이었고, 커튼에는 작은 물방울무늬가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창문과 욕실 문의 손잡이는 모두 차분한 금빛을 띠고 있어서, 전체적인 분위기에 색상과 질감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고급 호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실내 공간의 톤과 색상 조합을 꽤 세심하게 신경 썼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심지어, 이후 아시시의 에어비엔비를 통해 묵은 가정집 형태의 숙소 욕실은 타일부터 샴푸 통, 수건에 놓인 자수까지 전부 그린 톤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명한 미술관이나 건축물이 아닌, 생각지도 못했던 공간에서 이탈리아인들의 색채 감각을 체감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뜨거운 물에 지친 몸을 씻으며, 때로 그 나라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시하는가는 그들의 삶이 맞닿아있는 일상 속 아주 흔한 공간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공간에서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형태를, 색을, 그것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마음을 보고 느낄 때마다 내가 다른 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가장 약한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고 먼저 잠든 사람들의 숨소리가 더욱 깊어진 것이 느껴졌다. 주방의 세 남자는 방으로 돌아갔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단단한 나무로 된 사다리를 타고 이층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침대에서는 잘 세탁되고 말려진 이불 냄새가 났다. 몸 위로 기분 좋게 바스락거리는 얇은 섬유의 촉감이 느껴졌다. 


나는 그날 방문을 닫고 국적도, 이름도, 생김새도 모르는 사람들과 어둠 속에 누워 깊은 잠을 잤다. 


꿈속에서 나는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절벽의 끝에 두 팔을 새처럼 벌리고 서서 소리 없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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