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에는 이맘때의 날들을 아주 좋아했다.
더 정확히는 4월 중순에서 5월 초순까지의 기간이다. 아직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는 여운이
가시지 않은 기대감과 활동하기 좋은 날이면서 풋풋한 봄의 향기가 좋았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나도 여자친구가 생길 것 같다는 막연한 자신 있는 기대감도 한몫했다.
이 맘 때에 내리는 봄비가 좋았다.
라디오를 자주 듣던 시절이었는데, 비 오는 날이라 감성에 젖은 DJ가 이문세의 '빗속에서' 나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같은 음악을 틀어주면, 반가움과 함께 비의 정서가 온몸을 촉촉이
적시며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는 가사의 감성에 푹 젖어 슬픈 눈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느껴지는 감성은 봄에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성이었다.
비 오는 날이면 소주 한 잔 하자는 친구들의 연락이 심심치 않게 왔다.
술집 창가에 앉아 창에 부딪히는 비를 보며 마시는 술은 평소보다 더 취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감상적이 되어 평소보다 친구에게 속마음을 더 많이 늘어놓기도 했다.
젊은 시절, 기억하기 부끄러운 주사에 관한 추억은 비와 적잖이 연결되어 있었다.
20대 시절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순한 물줄기 이상의 그 시절의 낭만을 품은 특별한
날들이었다. 비에 관련된 노래가 많았던 것은 모두가 비 오는 날의 특별한 낭만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었을 거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시절이 바뀌어서 그런 것일까? 요즘에는 비 오는 날의 낭만을
느낀 지 꽤 오래된 듯싶다. 얼마 전에도, 지인과 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비가 와서
더위가 한 풀 꺾여 시원해서 좋다는 게 대화 내용의 전부였다.
요즘엔, 겨울에서 여름으로 곧장 직행하는 듯한 날들이 해마다 이어져 봄의 특별한 감성을
느낄 틈이 없다. 게다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앞에 앉은 사람도 소홀히 쳐다보는데,
하늘 바라볼 일이 더 없으니, 봄비의 낭만을 즐길 여유도 없는 듯하다.
봄비가 내리면, 20대 때 비 오는 날 버스를 탔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떠오른다.
버스 안에서는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통해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이 버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덤덤한 얼굴로 창밖으로 비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은
슬프면서도 여유롭게 보였던 것은 비와 김현식의 노래 때문이었을 거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그날의 버스 안과 비가 오면 옛 연인이
떠오른다며 절규하는 김현식의 노래가 떠오른다. 비의 낭만과 비 노래가
어우러졌던 그날의 낭만적인 감성은 시간이 흘렀어도 조금도 잊히지 않았다.
얼마 전, 비 오는 날 비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느껴졌던 봄 비의 감성이 이제 곧 지나갈
봄과 함께 가는 것이 아쉬워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적으면서 그 감성을 잡고만 싶은
것은 흘러가는 세월이 아쉬움일까? 봄 비의 낭만을 너무 오래 잊고 산 안타까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