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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버 Nov 06. 2024

젊음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뒤늦게 피어나는 화려함이 더 길고 짙은 법

이맘때가 되면 가는 세월이 야속하다. 나이가 들수록 야속함은 더해 간다.

젊은 세대는 예나 지금이나 시간이 흘러가든 말든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이가 든 뒤, 가끔 20대를 만나면, 20대 특유의 오만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그들은 모를 것이다. 나도 20대 때는 몰랐으니까.

그 오만함은  20대는 '젊음' 그 자체이고, 그게 큰 자랑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그들도 안다. 그래서, 같은 20대에서는 학력, 재력, 직장 등의 조건으로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끼지만, 나이 든 사람들 앞에서는 오만할 정도로 당당해진다. 사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음'은 큰 자랑이다. 힘도 있고, 무엇보다 시간의 가능성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뿐더러

돈 주고 살 수 없는 부러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과 20대 시절에 좋아했던 노래는 평생 듣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새로운 곡과 가수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어렸을 때처럼 흡수하듯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젊었을 때 듣던 노래는 나이가 들어서도 즐겨 듣게 된다.

외국에서는 가수와 팬이 같이 나이 들어간다는 마인드로 교류한다고 하지 않는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가수의 라이브를 듣고 싶어 유튜브로 찾아보면 최근 영상부터 

보여주는데, 대부분 실망하게 된다.

전성기였던 젊은 시절처럼 소리를 힘 있게 내지도 못하고, 숨도 짧고, 바이브레이션은

과도할 정도이다. 노래로 가치를 인정받는 가수는 그래서 세월의 잔인함을 온몸으로

맞는 듯싶다. 그래서 요즘 가수들은 음악적 실력이 자신 없으면, 전성기 때부터 제2의

인생을 찾아 드라마와 영화를 끊임없이 기웃거리는 모양이다. 하긴, 조용필이나 나훈아처럼

지는 젊음을 음악적으로 견뎌낼 자신이 없으면 미리미리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지.

큰 자랑인 '젊음'이 사라지기 전에.


가수보다 몸이 더 큰 자산인 운동선수는 상황이 상대적으로 나은 것처럼 보인다.

나이가 들면 신체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지만, 선수시절의 기술, 노하우는

머릿속에 각인된다. 각인된 기술을 바탕으로 코치, 감독, 해설 혹은 생활체육의 코치도 할 수

있으니, 직접 몸을 쓰지 않아도 자신이 쌓은 가치를 어느 정도는 인정받는다.

그럼에도, 전성기 때 보여준 퍼포먼스를 단지 나이가 들었다고 못하는 것을 보면 허망하기는 하다.


신체능력이 나이 들면서 저하되어 기술과 노하우가 충분해도 젊은 시절과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것을 보면, 인생은 꽃과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른 동물과 인간은 차원이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육체능력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인생은 꽃과 같다는 낭만적으로 보이는 은유를 했지만, 이렇게 표현하고 감상에 빠진다면 

'젊음' 자체에 인생이 좌우된다는 믿는 거는 아닐까? 그런 믿음이 있다면 짧은 인생이 더욱 허무하게

느껴진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많은 편이다.


인생을 꽃처럼 젊었을 때 크게 되고, 나중에는 지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생물학적인 사고방식에만 갇힌 것은 아닐까?

인간은 뇌를 다른 어떤 동물보다 많이 사용하고, 육체로만 할 수 있는 가치창출을 때로는

넘어선다. KFC를 창업한 커넬 센 디스는 60대 후반에 창업해서 거대한 프랜차이즈 업체를

만들었다. 배우 나문희, 변희봉은 전성기가 60대 이후에 왔다. 이들의 인생을 보면,

인간의 삶에 꽃이 피는 시기는 반드시 젊었을 때만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평생 꽃을 피우기 위해 경험과 노력, 에너지를 응축했다가 어느 순간 꽃을 피우는 거다.

물론, 꽃을 피우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건 우리 인생이 동화 속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니

감내해야 할 것이다. 나중에 꽃을 피울 때는 큰 자랑인 '젊음'은 없다. 

그럼에도, 화려함은 이따금 젊음 못지않을 때도 있다. 느지막이 피는 화려함은 쉽게

지지도 않는다.  게다가 뒤늦게 찾아온 화려함은 화려함에 그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나문희, 변희봉이 그렇지 아니한가? 최근 한강 작가는 또 어떠한가? 몇십 년을 꾸준히 써온

작품들이 불꽃축제처럼 화려하게 터지고 있지 않은가? 존경심을 동반해서..

젊음이 가질 수 없는 화려함이다.


나문희, 변희봉, 한강 작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문희도 그렇지만, 변희봉의 경우 영화 '살인의 추억' 이전에는 얼굴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럭저럭 가끔 tv에 나오는 단역이나 악역 전문 중년배우로 인식되었었다.

단역과 고약한 악역을 하며 내공을 쌓은 그를 눈여겨본 봉준호 감독이 선택해서 그 내공을 펼친 것이다.

단순히, 봉준호 감독의 선택이 변희봉의 성공을 좌우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강 작가의 경우도 2016년에 맨부커상을 받은 채식주의자는 2007년에 출간된 작품이다.

한강 작가의 작품의 경우 맨부커상이나 노벨상을 받기 전까지는 독자가 읽기 불편한, 잘 안 팔리지만

작품성은 작가들 사이에서는 알아주는 그런 작가였다. 만일, 상을 받지 않았다면,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쓰는 작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우리들도 모두 자기가 잘하거나, 오랫동안 경험을 갖고 있어 축적된 나만의 특별함이 있는 사람이 적잖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특별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삶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세상이 알아주면 좋고, 그에 

따라 경제적인 이득도 있으면 매우 좋겠지만. 지금도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쌓는 이들이 여러 곳에 있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을 봐도 그런 사람이 차고 넘친다. 

그런 사람들은 남들이 모르지만, 자기 삶의 본질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갖고

기쁨을 느끼고, 삶의 커다란 원동력으로 삼아 물리적 젊음 없이도 늘 활기차고 젊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활기는 쉽게 지지도 않는다. 역시나 젊음이 흉내 낼 수 없다. 


젊음을 자랑만 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혹은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도전했던 

응축된 삶이 뒤늦게라도 화려한 꽃을 피우는 법이다. 

젊음은 도저히 흉내 낼 수도 없고, 물리적으로도 가능하지 않다.

오랜 기간 진정성 있는 삶을 산 자만이 쉽게 지지 않는 화려한 불꽃을 피우는 것이다.


젊음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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