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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再會)

-무너진 아버지의 교육철학...

by 차민기 minki

#-1. 다시 부모님 곁으로...

하나 있는 아들 공부는 도시에서 시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교육 철학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마산에서의 생활은 진작 그렇게 짧게 끝내야 할 일이었다. 부모의 돌봄이 없는 그 시대 대부분의 아이들은 ‘촌지’와 ‘육성회비’ 사이에서 오갈 데를 잃고 늘 삐뚤어지기 일쑤였다. 그 시간이 길었더라면 나는 아마 회원동 500번지의 그 해방촌 골목을 헤어나지 못한 채 젊은 날을 내내 어두운 도시의 골목을 전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 그때의 동무들 몇몇은 그렇게 뒷골목을 전전하다 사라지기도 하고, 간간이 실패한 인생으로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다.

회원동 500번지는 교방천의 한 곁에 꾸려진 해방촌이다. 지금은 재개발로 아파트 촌이 들어섰다.

어쨌거나 마산에서 채 1년의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나는 짐을 쌌다. 부모님이 계신 시골로 다시 전학을 했다. 부산에서처럼 마산에서의 마지막 날도 기억에는 없다. 누가 데리러 왔었던지, 내가 떠나던 날, 누나들은 울었던지 아니면 홀가분해 했던지...표정도 분위기도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빨간 줄이 온몸을 휘감은 완행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고갯길을 넘었다. 버스 뒤로는 비포장도로가 뿜어내는 뿌연 흙먼지가 저 아래 도시를 기억에서 지워내고 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도시였다. 그러나 이내 그 도시가 다시 그리워질 줄은 그때 미처 몰랐었다.


#-2. '들', 그리고 '딸'


버스에서 내려 40여 분을 걸어 도착한 곳은 10여 호의 집들이 오그종종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아주 어릴 땐 아버지를 따라 강을 건너 오던 마을이었다. 수십 년 전, 이 마을을 떠났던 아버지는 도시 몇 군데를 전전하는 동안 식구만 불려 다시 이 마을로 돌아온 셈이다. 나는 아버지가 불린 그 식구 가운데 유일한 사내아이였다. 그래서 가난하기 짝이 없던 살림에도 조그만 혜택이라도 주어질라치면 그건 전부 내 몫이었다. 누이들은 그 차별을 꿋꿋이 견뎌냈고, 그건 나중에서야 네 명의 누이들 가슴에 모두 응어리로 맺혔다는 것을 나는 마흔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내 큰누이가 환갑에 이른 때였다. 어린 나에서부터 마흔이 되기까지의 나는, 혹여 누군가 ‘귀한 아들’의 서사를 꺼낼라치면 “차별이라 할 것도 없으리만치 가난했다”는 말과 표정으로 나 스스로를 합리화 했다. 그러나 그건 수혜를 입은 자들의 손쉬운 자기 망각임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가난 속에서도 나는 분명한 수혜자였고, 그 혜택들이 온전히 나에게로 향하는 동안, 가족에게 드리운 가난의 그늘은 네 명의 누이들이 고르게 감당해야 했다.


#-3. 한 학급이 한 학년의 전부였던...

한 학급이 한 학년의 전부였던 시골 학교에서의 일상은 여유로웠다. 과제는 만만했고 시험은 걱정이 없었다. 한 학년이 600여 명이던 도회지 학교에 비하면 학 학년 총원이 60명이 채 안 되는 시골 학교에서는 공부하는 아이들이 손꼽을 정도였다. 나이 든 선생님들은 대개 그 인근 지역 출신들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도회지에서 출퇴근 하는 젊은 선생님들은 초임인 경우가 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봤자 전 교직원이 10명도 채 안 되는 규모이고 시골 살림이 대개 고만고만한 것들이었기에 ‘촌지’의 영향력은 눈에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누구나와 잘 어울렸고 선생님들은 모두에게 무관심하거나 모두에게 애정을 보였다. 그 평등의 관심과 무관심 속에서 나는 차츰 안정되어갔다.

그땐 책상이고 교실이 이리 작은 줄 몰랐다.

내가 가진 도회지 물건들을 아이들은 신기해했고, 그런 관심을 처음 받아본 나는 심적으로 조금은 우쭐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도 같다. 우리의 가난은 그 시골에서 티나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은 잘 사는 집 아이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애써 부정하지도 않은 채 나는 내가 가진 문방용품과 갖가지 도회지의 생활 용품들을 아이들에게 은근히 자랑했다. 나는 금세 학급의 중심이 되었고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반장을 놓친 적이 없었다. 6학년이 되어선 전교회장이 되어 매주 월요일이면 조례대 앞에서 “전체 차렷!”을 외쳤다. 여전히 가난했으나 화사한 날들이었다. 초임이었던 5학년 때의 여자 선생님은 그런 나를 무척 예뻐해 주셨고, 울진의 어느 학교로 전근을 가고 나서도 그 학교 학생과 펜팔을 연결해 주기도 했다. 부모님의 돌봄은 여전히 학교에까지 미치지 못했으니, 내가 학교 생활의 중심이 된 것은 오로지 나 스스로의 능력 때문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같다. 처음 나 자신에게 가져 본 자존감이었고, 성취감이었다.



#-4. 수컷들의 전쟁

-자존심과 객기 사이의 어디쯤

그렇다고 마냥 학교 생활이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집단이고 간에 수컷들은 수컷들끼리의 기싸움이란 게 있나 보다. 그때 사내애들은 그저 센 척, 하는 것만으로 모두 앞에서 우월감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수컷들 사이에 나는 대단한(?) 경쟁자였던 셈이다. 그때껏 반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사내 애들 몇몇은 사소한 일들로 은근한 시비를 걸어 오곤 했다. 기껏 초등학교 4학년 짜리들이...ㅎㅎ.

그중 한 명은 호적 신고가 늦어 실제로는 또래보다 세 살이 많았다. 그만큼 키도 훌쩍 컸고, 운동을 두루 잘할 만큼 신체 능력이 뛰어났다. 그에 비하면 자그마한 체구에도 기죽지 않고 따박따박 자기 할 말 다 해대던 나라는 존재는 갑자기 박힌 눈엣가시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때껏 그가 누려왔던 우두머리로서의 권리가 내 눈에는 부당하게 보였고, 도회지에서 불평등을 온몸으로 체감한 나로서는 또래 사이에 있을 법한 그 사소한 불평등조차도 용납되지 않았던가 보다. 예를 들어 청소 당번임에도 당번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는 것이나, 소각장 당번을 번번이 다른 아이에게 떠넘긴다거나, 난로 위의 도시락 질서를 일방적으로 헝클어뜨리는 정도의 규칙들. 그건 우리 모두가 스스로 지켜야 하는 규칙이었고, 그 규칙을 어겼다고 해서 선생님께 고자질해서 바로잡을 만한 규모의 규칙은 또 아니었다. 그래서 모두들 침묵으로 그 헝클어진 질서를 규칙으로 용인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그 규칙을 바로잡고 싶었고, 그럴 때마다 그와 충돌했다. 때로는 멱살잡이를 하고 때로는 코피 터져가며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다.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 여겼고, 시작한 다음부터는 모두가 지켜보는 시선 앞에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그 몇 번의 충돌로 수컷들의 전쟁은 흐지부지 끝났다. 나는 아이들의 불만을 대신한 전사였고, 절대 다수의 시선은 그에 대한 표나는 반감으로 바뀌어 갔다. 결국 그는 어느 날 내게 앞으로 싸우지 말자,는 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내심 두렵고 지쳤던 나는 덥썩 그 손을 잡았다. 동맹이라면 동맹이었을까...그 후 나는 그와 때로는 공범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가 내 규칙을 순순히 따라주는 식의 무언의 협상으로 이상한 규칙이 정해졌다.

<철암탄광역사촌>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촬영 판넬

훗날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을 때 오래 잊고 있었던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의 ‘나’를 돌아보았다. 영웅도 리더도 아닌, 그저 치기어린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저 시골 아이들 앞에서 은근히 스스로를 뽐내고 싶어했던 유치한 사내 아이 하나가 거기 서 있었다. 그 사내 아이를 발견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린 셈이다.

......

그렇게 옛일을 돌이켜 보는 자리에선 또 어떤 모습의 내가 서 있을지...화끈, 낯이 붉어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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