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급위원과 이기적 아이 사이
영도 그 비탈길에서의 나날살이는 풍족하진 않았으나 어린 내가 느끼는 결핍은 기껏해야 남들이 갖는 장난감을 못 갖는다든지, 로보트 태권브이나 황금박쥐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다는 정도였다. 문방구를 겸한 가게였기에 크고작은 간식거리들이 늘 진열되어 있었고, 커다란 업소용 냉장고 안에는 다른 집 아이들이 함부로 엄두를 내지 못했던 부라보콘이 늘 그만큼의 개수로 채워져 있었다. 그렇다고 매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시험을 잘 치고 오면 엄마는 아버지의 눈치를 봐가며 어렵게 그 하나를 꺼내주곤 했다. 그래서 나는 시험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 유년은 딱 그만큼의 결핍이었다. 그럼에도 그땐 그게 얼마나 절실했었는지...동네 아이들이 극장에서 황금박쥐를 보고 왔다고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골목길을 뛰어다닐 때 나는 어두컴컴한 방에 틀어박혀 한껏 삐딱한 표정과 마음으로 엄마의 마음을 마구 할퀴어댔다. 아버지에게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던 반항심은 애꿎은 엄마에게로 향했고, 그 모질고도 잔인했던 반항의 언행은 서른이 되도록 드문드문 반복되었던 듯싶다.
그땐 가정방문이라는 게 있었는데, 우리집을 다녀 간 선생님의 눈에는 우리집 형편이 살만해 보였던가 보다. TV도 없고, 피아노도 없던 집이었는데...부산에서의 그 몇 년 동안 나는 내내 학급위원이었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학급위원 표찰을 가슴에 달 수 있었던 것은 전교권 안에 들었던 나의 성적때문일 거라고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만큼 그 비탈길에서의 생활 형편은 다들 고만고만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학급위원이 된다는 게 당시 우리 부모님들껜 어떤 의미였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번번이 갈아입는 옷에도 꼭 가슴팍에 정성스레 옷핀으로 달아주었던 그 동그란 표찰 하나는 가난한 살림 속에 좀체 만나기 힘들었던 작은 위안 정도는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표찰의 대가로 치러야 했던 육성회비는 그 작은 위안에 비하면 너무 버거웠던 것은 아니었을지. 그럼에도 어린 자식의 자존감을 위해 그 작은 표찰 하나를 떼어내지 못했던 부모에게 가난의 결핍은 어떤 것이었을지.
영도의 그 비탈길을 떠나던 날은 이제 기억에서 흐릿하다 못해 거의 지워져 있다. 이삿짐 뒤에 서서 손을 흔들어 주었던 이가 누구였는지,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 봄이었는지 겨울이었는지...아무것도 기억에 없다. 분명 슬펐을 테고 눈물을 흘릴 법도 했을 터인데 그조차 기억에 없다. 술에 취해 잃어버린 기억처럼 뭉텅, 그 부분만 잘려나간 느낌이다.
나의 행선지는 누이들이 자취하는 마산이었다. 공부는 도시에서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교육관의 결과였다. 대학에 합격하고도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누이에게, 어린 동생의 교육을 떠맡긴 아버지의 결정은 이후로 두고두고 누이에게 상처로 남았고, 이후로 칠순을 넘기고서도 아비는 누이의 그 상처 앞에서 늘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어야 했다.
부모와 떨어져 누이들과 시작한 유년기의 한 때는 결핍투성이였다. 단순히 장난감이거나 영화 정도가 아니라 일상 자체가 결핍으로 빼곡했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서적인 결핍은 이후로 내 안에 우묵한 우물 하나를 파놓아서 나는 때때로 그 깊고 어두운 우물 속으로 기어들곤 했다.
새로운 학교에서 나를 제일 힘들게 한 건 담임 선생이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그 이름 석 자는 결핍된 자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를 온몸으로 깨우치게 해주었다.
‘학급위원’이라는 표찰을 내세워 반짝였던 부산에서의 내 유년은 불과 몇 달 만에 촌지로 반짝이는 아이들에 묻혀 이름 석 자조차 제대로 불리기 힘든 존재가 되어 버렸다. 소풍도 운동회도, 촌지봉투는커녕 선생의 김밥 한 줄 싸들지 못하는 결핍의 시간 속에서 나는 늘 어두운 아이, 소심한 아이,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내성적 아이로 새겨졌다. 그리하여 그해 내 생활통지표의 ‘학생평가란’에는 ‘이기적인 면이 있음’이라는 낙인같은 문구가 기록되었다. 그땐 이기적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한참 뒤에 이기적이라는 단어 뜻을 알게 되었을 때 난 그 담임이 어느 학교에 있는지 찾아보고 싶을 정도였다. 이후로 인터넷 검색이 일상이 되고 교육청이 ‘옛 스승 찾기’ 같은 이벤트를 할 때면 어김없이 그 담임을 찾아다녔다. 그의 노년이 궁금했던 까닭이다. 단순히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초라하게 몰락했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돌이켜보면 부산에서 내가 학급위원으로 반짝였을 때, 그 비탈길 어느 골목집 안 누군가도 그때의 담임을 원망하진 않았을까? 문득, 그런 물음이 생겼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 난 학급위원이 될 만한 자질을 스스로 갖추었다는 확신으로 그 원망과 의문 앞에서 당당하고자 했다. 시계도 볼 줄 모르고, 한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수퍼마켓집 학급반장이 아니라, 600여 명을 전부 내 뒤에 세울 정도로 당당한 학급위원이었다는 자신감...그러나 공평과 불공평의 기준은 골목 안에 비스듬히 스며들던 햇빛과도 같은 것이란 걸 이제는 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햇살과 그늘의 경계처럼. 거기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걸...그리하여 기울어진 곳에 서 있는 이들에겐 언제나 세상은 불공평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는 걸...그래서 우리 삶은 기를 쓰고 비탈진 골목길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일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