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사고는 가족 모두에게 큰 충격과 슬픔이었다. 엄마는 장녀로서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무엇보다 가족을 우선으로 챙겨왔기에 그 빈자리가 많은 이에게 고통으로 남았다. 아빠와 할머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우리 남매 걱정에 힘든 티를 내지 않으셨다.
일상생활에서 겪는 사건들 중 스트레스 강도가 가장 높은 건 자식의 사망이라고 한다. 배우자 사망과 부모 사망은 각각 2위와 3위다. 엄마의 한평생을 함께 해 온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슬픔은 어땠을까. 내 감정에 빠져 두 분을 돌보지 않는 동안 의연하게 버티시던 노인들이 병을 얻으셨다. 스트레스가 몸으로 나타난 것이다.
엄마가 떠난 지 4년 만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이듬해 외할아버지도 숨을 거두셨다. 두 분 다 병명은 암이었다. 젊고 건강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이별하게 될지 몰랐다. 외할아버지는 가끔 동생과 뵈러 가면 평소처럼 환하게 웃으며 반기셨고 힘이 되는 얘기들을 해주셨다. 마음이 여리신 외할머니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우리에게 열심히 살라고 당부하시곤 했다. 결국 괜찮아 보여도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은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집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홀로 시골에서 생활하시던 할머니가 밭일을 나갔다가 대상포진에 걸려 한 순간 기력을 잃으셨다. 아빠와 삼촌들이 일 좀 그만하시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가만히 있는 성격이 못 돼 할머니는 늘 어딘가를 다니셨다. 할머니가 병상에 눕기 전날 시골에 놀러갔다 온 나는 멀쩡하던 할머니가 그렇게 되신 게 더욱 믿기지 않았다. ‘어제 분명 나랑 엄청난 수다를 떨며 밥을 먹고 TV를 보고 산책을 했는데 할머니가 왜’라며 현실을 부정했다. 할머니는 대상포진 합병증으로 이 병원 저 병원 옮겨다니셨고 한 대형병원 중환자실에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할머니를 1년에 한분씩 차례로 떠나보내고 말았다. 엄마 사고 2주 전 위암으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집안 누군가의 죽음을 처음 접했는데, 같은 해 엄마를 잃고 6년 만에 양가 조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엄마와 아빠가 다 첫째라서 할머니·할아버지·외할머니·외할아버지가 젊은 게 내겐 자랑거리였다. 엄마뿐만 아니라 그분들과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나. 인생의 허무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아빠와 나와 동생은 다시 각자의 위치에서 일상을 보냈다. 혼자 거주하며 회사와 집만 오가던 아빠는 주말이면 더 부지런히 강원도 절에 다니셨다. 그곳에서 스님들과 대화하고 봉사도 하시면서 여유를 찾으셨다. 우리가 동행할 땐 좀처럼 안 하던 자식 자랑까지 하시며 편한 미소를 지으셨다.
자기관리가 철저한 아빠는 20대부터 쭉 같은 몸무게를 유지하며 건강을 챙기셨다. 매년 건강검진도 꼬박꼬박 받고 몸에 해로운 음식은 좋아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아빠가 단 하나 포기하지 못한 나쁜 습관, 흡연이 건강을 위협했다. 몇 달 전 건강검진에선 깨끗하던 폐에 암이 생긴 것이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좋은 날만 남았다고 생각한 시점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라니! 건강검진 당시 확인이 안 된 암이 그새 말기라는 얘길 듣고 아빠는 주치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다른 병원을 찾았다. 폐암 3기였다. 항암치료를 잘 해서 5년을 더 산 사람도 있다고 했지만 그래봤자 5년 아닌가. 이제 좀 살 만해졌는데 아빠마저 잃으면 어떡하나 싶어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아빠는 정신력이 강한 분이라 항암치료를 적극적으로 잘 받으셨다. 동생과 내가 바쁠 땐 씩씩하게 혼자 병원에 다니시며 용기를 내셨다. 극심한 통증도 참아내셨고 식사도 잘 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의사가 수술을 제안했다. 어려운 수술은 아니지만 잘못될 수도 있다면서 우리에게 어려운 숙제를 냈다. 웬만하면 안 건드는 게 좋겠지만 수술을 하면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 그 가능성에 기대를 하고 싶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상의 끝에 수술을 하기로 했다. 수술 직후 의사는 수술이 잘 됐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아빠의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 멀쩡하던 정신이 오락가락 하기도 하고 걷기도 어려워졌다. 병원에서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해 아빠를 동생 집 근처 요양원으로 모셨다. 그곳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급속도로 병이 악화돼 돌아가셨다. 폐암 진단을 받은 지 불과 6개월여 만에 아빠는 세상을 등졌다.
최악이라고 생각한 상황보다 더한 최악도 있다는 걸 미리 예측하지 못했다. 내겐 아빠밖에 없었는데 아빠마저도 그렇게 떠나보낸 후 감정이란 게 모조리 메말라버렸다.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잃고 나니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내 불행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아빠가 한없이 가여워 ‘내 인생은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비관하거나 원망할 수도 없다.
벌써 6년이 지났다. 나를 첫 번째로 생각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온전히 나로서 살아가느라 지금도 어설프다. 부모로부터 심적 독립을 하는 건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이다. 맹목적인 사랑을 차고 넘치게 받았기에 나는 외롭지 않다. 엄마와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언제나 내 자존감의 원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