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 음식사 '희'
얼마전 퇴사한 동기는 나를 ‘상미’라고 불렀다. ‘상 미친여자사람’의 줄임말이다. 내가 입사한 후 27명이 사직서를 내고, 나를 활활 태우던 팀장님마저 회사를 떠날 동안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퇴사 이유는 다양했다. 얼굴 맞대고 밥 먹기 싫을 정도로 심각한 팀원 사이의 불협화음. 저녁 약속을 N번째 파토내며 극한으로 치달은 인간관계. 여기가 중국집도 아니고 A안과 B안을 더한 짬짜면 같은 C안을 원하는 클라이언트. 오죽하면 페이스북에 ‘내가 광고회사 힘들다 그랬잖아’라는 페이지가 있을 정도다. 내가 퇴사하고 싶은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런 갖가지 이유가 있는데도 내가 오늘도, 내일도 출근하는 이유는 뭘까.
스스로 이 질문을 던진 후 오랜 시간 고민했다. 마치, 취준생으로 돌아가 지원동기 칸을 채우는 느낌이랄까. 아니. 출근을 왜 하냐니. 이건 나도 알고, 대한민국 모든 직장인 다 아는 답이다. 돈 벌려고. 세속적이지만 현실적인 이유다. 하지만 이 네 글자가 내 출근의 이유를 모두 대변하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글자 수 제한 700자에 맞춰 지원동기를 잘 포장하듯 다른 이유도 생각해보자.
회사에 출근하고 한 달은 짠 내의 연속이었다. 출근 5일 차. 나와 평생을 함께 하는 동반자가 되지는 못해도 일 년은 함께 할 거라 믿었던 같은 팀 동기가 퇴사했다. 출근 7일 차. 겨울이면 늘 달고 살던 목감기가 너무 심해 병원을 찾았다. 퇴사한 동기가 나에게 A형 독감을 선물하고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A형 독감이 대대적으로 유행 중이었고, 나는 바이러스 취급을 받으며 집에서 자가격리 기간을 가졌다. 사실 진짜 집도 아니었다. 인턴 기간 후 무사히 정직원으로 전환되면 다행이지만 안될 경우를 대비해 쉐어하우스에 살았기 때문이다. 2인 1실이라 병실처럼 커튼을 쳐놓고 침대에 갇혀 며칠을 내리 앓았다. 출근 7일 만에 이게 무슨 꼴인지.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엄마께서 끓여 주시는 얼큰한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먹고 싶었다. 출근 10일 차. 따끈따끈한 이마와 칠순을 넘긴 할머니처럼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를 하고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는 경쟁 PT로 정신이 없어 농번기에 접어든 시골 마을을 연상시켰다. 회의 후 회의. 도돌이표가 따로 없었다. 출근 14일 차. 새벽 3시가 넘어 쉐어하우스 거실에 혼자 불을 켜놓고 앉았다. 회의자료를 준비하며 오늘은 몇 시간이나 잘까 싶었다. 대망의 출근 30일 차. 인수인계 종이만 남기고 전임자가 나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세상 따스한 분이라 생각했던 팀장님 때문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내 스스로를 잘 마른 장작. 태워지기 딱 좋은 장작이라 생각한 게. (활활)
그렇게 몇 번의 PT가 더 있었고,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정말 공들여 준비한 PT를 땄다. 그날 오후 4시, 우리는 컴퓨터를 끄고 승리원에 모였다. 승리원. 정말 남다른 곳이다. PT 전날이면 대대로 내려져 오는 민간신앙처럼 승리원을 찾는다. PT에서 승리하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짜장면을 비비는 곳이다. 진짜 승리하고 모이니 감회가 남달랐다. 주구장창 면류만 시키다 드디어 요리류도 시켰다. (감동) 대표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고량주를 하사해주셨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고량주. 짜릿했다. 큰 프로젝트에 함께할 수 있었다는 기쁨과 좋은 결과로 이어진 성취감에 듬뿍 취한 저녁이었다. 짠 내 나던 겨울의 설움이 녹아내렸다.
그 후로도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다고 15,952번쯤 말했을 만큼 여러 고비가 찾아왔다. 새벽마다 택시에 실려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나름대로 고심해서 낸 자식 같은 아이디어들이 한 방에 킬 당한 적은 수도 없이 많다. 저 사람 안 나가면 내가 나간다며 사생결단을 내기도 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 보니 이제는 수정이 안 오면 불안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데도 이 일이 좋다. 참 이상한 일이다. 새로운 광고주를 만날 때마다 이전에는 모르고 살았던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두피 스케일링 방법. 매트리스 레이어 구성. 단백질 섭취의 중요성. 알쓸신잡에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가끔 출시 예정인 신메뉴를 먼저 맛보는 기회도 찾아온다. 그럴 때 ‘아 회사 이 맛에 다니지’ 싶다. 내가 쓴 카피가 한 단어만이라도 최종안에 들어가면 그게 또 그렇게 기쁘다. ‘내가 너무 못나지는 않았구나.’ ‘그래도 밥값을 조금은 하고 있구나.’ 싶어 안심이 된다.
퇴사하고 싶다는 말을 염불 외듯이 하고 있지만 아직은 일이 좋아서 퇴사를 잠시 미뤄두고 있다.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마음이다. 그래도 지금은 승리원에서 짜장면을 비비는 긴장과 설렘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다. 물론, 비비고 나서 결과가 좋아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