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자의 변명
실직자의 변명
“야, 이 새끼야, 당신이 뭔데 나를 짤라?”
“내가 니 새끼냐? 널 내가 짤랐냐? 니네 사장이 짤랐지.”
“기준이 뭐야?”
“기준이 어디 있어, 바보야. 짤렸으면 창피한 줄 알고, 조용히 있어.”
“당신도 사표 냈다며? 당신도 짤린 거야?”
“바보야. 짤릴 때까지 기다리냐?”
“근데, 우리, 이제, 뭐, 해먹고 살지?”
“설마, 굶어 죽겠냐? 나는, 지금부터 자유야”
서울역 뒷길, 작은 포장마차에는 잘린 놈과 자른 놈들끼리, 누가 누구를 잘랐는지
모르는 놈들끼리, 바보들끼리 어울리며, 한세상 부장은 밤늦도록 퍼 마셨다. 식당 안은 시장바닥이었다. 혼자 와서 고개를 푹 숙이고 술잔만 바라보는 사람, 찌게 한 그릇을 시켜놓고 셋이 둘러 앉아 소주를 몇 병씩 깐 사람, 목소리 큰 경상도 아저씨와 아줌마의 말다툼하는 모습들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밤이다.. 저쪽 구석에서 앳된 여자애들끼리 깔깔거리며 웃고 떠드는 모습도 보였다. 한부장과 어울리는 서너 명들도 울다가 웃다가, 멱살을 잡았다가 볼때기를 때리다가, 손잡고 웃었다. 친구인지 원수인지, 동료인지 남인지 구분이 안 될 것 같은 사이로 보였으리라. 어쩌면 사채업자와 채무자와의 관계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게 뭔 대수이겠는가?
술이 취한 듯, 세상살이에 멍 들은 듯, 방향을 잃은 놈들은 온다간다 말도 없이, 소리소문 없이, 하나 둘씩 다 없어졌다. 혼자서 술값을 다 내고 투덜거리면서 한세상도 일어섰다. 그래 세상이 그런 거지 뭐.
한세상부장이 서울역 앞 광장 계단으로 천천히 내려오는데, 덩치가 크고 잘 생긴 젊은이가 앞을 가로 막는다.
“형, 천원만”
“내가 니 형이냐?”
“형, 담배 한 개비만.”
“나, 담배 안 피워. 저리 비켜, 임마.”
“에이 더러워, 싫으면 말구,”
겉보기에 멀쩡한 젊은이가 거지행색을 하고 구걸을 한다.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고, 나이 든 노인네도 아닌 남자가 역 주변을 빙빙 돌면서 돈을 뜯고 주머니를 턴다. 한두 명이 아니다. 여자도 있다. 잔뜩 짐을 싼 듯한 비닐봉지엔 뭐가 그리 많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다. 사오정(사십오세정년)이 된 한세상 부장은 냄새 나는 서울역 대합실을 내려와 두리번거렸다. 남산 중턱에 비치는 햇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서울역 앞 광장으로 나와 갈 곳을 찾는다. 어디로 가야 하나? 가야 할 곳을 정하지 못하고 서성이며 서울역 광장 아래 위를 훑어보니 거긴 더 가관이다. 술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곳곳에 서너 명씩 있다. 한 남자는 길 옆 드럼통에 다리를 걸치고 바지를 훌렁 내리고 오줌을 누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시커먼 물건을 보여주고 싶은 지, 보란 듯이 바지 춤에서 꺼내 흔든다.
반대편 구석에는 예닐곱 명이 둘러 앉아, 안주도 없는 소주병들을 깔아 놓고 있다. 종이상자와 헝겊쪼가리, 찢어진 이부자리 같은 것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고, 그 중엔 여자 두어 명이 낄낄거리고 있다. 한세상은 그 자리에 끼어들어 가서 참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자칫하면 몰매 맞기 십상이다.
“냄새는 오죽할까?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 되었을까?”
한세상은 뭘 보든지 궁금한 게 많다.
한세상은 마땅히 발길 닿을 곳을 잃은 채, 넋 놓고 난간에 기대어 그들을 살펴 보는데, 갑자기 그들 안에 섞여서 노래를 부르는 한세상 자신을 발견한다. 아주 큰 소리로 술잔을 들고 춤을 추는 한세상이가 저 안에 있다. 저들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술잔을 주고받는 자신을 보고 움찔 놀란다.
“그래. 저 놈들이 바로 나야. 저들 중에도 한때는 잘나갔던 사람도 있고, 한 소리 하던 놈도 있고, 권력과 명예를 쥐고 흔들던 사람도 있을 거야. 아마도 여자에게 빠져 시간을 날렸거나, 노름에 빠져 돈을 날렸거나, 빚 보증 하나 잘못 섰다가 저곳에 온 사람도 있겠지. 어떤 사람인들 없겠어?
우연히 만난 사람과 큰 사업 한 번 해 보겠다고 나섰다가 집안을 말아 먹은 사람도 있겠지. 부모 재산을 날린 놈도 있고, 자식이 망쳐놓은 집안도 있을 것이고, 친구 잘못 만나 보증 잘못 서서 가세가 기울어진 사람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힘들게 버티는 사람들 중에 나쁜 놈들은 없을 거야. 높은 자리에서 부자들 등쳐 먹거나, 여자들 잡아다가 제 멋대로 흔들며, 인간과 여자들을 돈으로 샀다가 권력으로 판 사람은 아마도 없을 거야.
집을 몇 채씩 갖고 빈손이라고 변명을 하거나,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주소를 옮겨 놓을 만한 머리를 가진 놈도 없을 테고, 군대는 모두 잘들 다녀 왔겠지. 차라리 무능하거나 너무 착하거나, 사람을 잘 믿어서 저리 된 사람들이 더 많을지 몰라.”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러고 살까? 하루 이틀도 아닐 텐데. 지나가는 사람에게 손 벌리지 말고, 낯 모르는 사람 주머니 털 생각일랑 하지 말고, 예쁜 여자들 궁둥이나 쳐다보면서 침 흘리지 말고, 농촌에 가서 밭을 매든지, 산에 가서 나무를 심어도 저것보다는 낫겠네.
전철에 떨어진 신문만 사서 팔아도 밥은 먹고 살겠네. 그러는 나는 뭔데? 지금 나는 뭐가 낫다고? 저들과 내가 다를 건 없어. 다 똑같아. 저들이 나였고, 내가 그들이었고, 그들이 나야. 내가 저들과 다른 게 뭔데? 저들이나 나나 같아. 나도 곧 저렇게 될 지도 모르지. 남 얘기가 아니지.”
한세상은 전철을 타면서 조심스럽게 구석으로 간다. 아는 사람 만날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서울역 대합실에서 주운 신문을 읽으려고 하니 이것도 운이 따르지 않는지, 어제 신문이다.
“아무려면 어때. 어제 신문이나 내일 신문이나 나 같은 주제에 무슨 신문나부랭이라도 읽을 가치나 있을까? 읽어서 뭐 한다고? 알아도 쓸모 없는 소식이나 뉴스거리가 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겠나? 그래도 혹시나 하고 상세히 훑어보니, 공공기관에서 임원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실렸네. 이력서라도 한 번 내 보고 싶지만, 벌써 다 뽑아 놓았거나, 높은 사람들끼리 돌아가면서 이미 다 정해 놓고, 쓸데 없는 돈 들여 가며 광고를 내는 거, 누가 모를 줄 아니?”
한세상이 더 읽을 가치도 소용도 없는 신문을 선반 위로 던지자 마자, 지나던 아주머니가 얼른 집어 간다.
“저걸 팔아서 돈을 버는군. 괜히 버렸네. 나도 지하철에 휴지통 뒤지고, 선반에 떨어진 신문을 주워서 팔까? 허리 춤에 잔뜩 끼어들고 다니는 저 신문 뭉치는 모두 얼마나 받으려나? 하루 세끼 밥값은 되나? 차비는 되려나? 별 걱정을 다하고 있군. 지금 누굴 걱정할 때니? 멍청한 놈.”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