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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영인 Aug 06. 2022

슬픔에 관하여

슬픔은 무거움이다. 슬픔 grief 이란 단어는 무겁다는 뜻의 중세 영어 gref에서 왔다. 사람들이 슬픔을 말할 때 가장 흔하게 쓰는 형용사는 ‘참을 수 없는’이다. 슬픔은 참아야 할 무엇이자 짊어져야 할 무거움인 것이다. 
-론 마라스코 · 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25쪽



감정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통해 슬픔을 설명한다. 

리비도(libido)는 (성충동의) 심리적 에너지를 말한다.

가령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욕망하게 되는 과정은 어떤 대상에 리비도를 투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슬픔의 감정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애도'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발생하는 슬픈 감정이다. 

애도 작업이란, 사랑의 대상을 상실한 뒤 고통을 겪던 주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그 대상에게 투여되었던 리비도를 철수시켜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정신적인, 그리고 정상적인 과정을 일컫는다.

애도 작업이 완수되면(사랑하는 사람을 잘 떠나보내면), 주체는 슬픔과 고통을 딛고 기운을 회복하여 다른 대상을 사랑할 준비를 하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의 장례식을 ‘정신적으로’ 다시 치르는 일이기 때문에, 애도 작업은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이다. 

어떤 의미에서 죽은 대상을 다시 죽이는 일이자, 대상과 관계 맺었던 ‘나’의 일부 역시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멜랑꼴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병리적 증상(우울증)을 가리킨다.

즉, 대상에게 투여되었던 리비도를 쉽게 철회하지 못하고 상실한 대상을 주체의 내부로 들여와 자신과 합체시킨 뒤 나르시시즘의 상태로 퇴행하게 된다. 

멜랑꼴리는 정상적인 애도의 실패를 뜻하며, 자신의 내부에서 ‘죽은 자’와 함께 살기를 고집한다. 

프로이트에게 애도의 과정은 상실의 대상으로부터 새로운 대상으로 건너가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리비도의 경제학이다.

반면, 멜랑꼴리의 주체는 다른 대상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리비도가 자기 안에 정체되어 있는, 병리적이고 퇴행적인 의미에서 비경제적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슬픔의 과정에서 확인하는 사랑의 대상을 경제학의 대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의 대상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대체 불가능한 사랑이 상실되었으므로 그 상실이 남긴 부재의 공간 또한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하는 슬픔은 때론, 종잡을 수없이 혼돈스럽고 고통스러워서, 자신조차도 감히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이 느끼는 슬픔은,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그런 슬픔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정신 분석학적인 슬픔은 결국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변증법적으로 느슨해지며, 그렇게 조금씩 사라지면서, 마침내 ‘화해에 이른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슬픔은, 그와는 반대로, ‘물러가지 않는다.’ 



슬픔은 원래 그런 것이다. 측정 불가능한 인간의 슬픔이 경제학적으로 수렴되는 것, 일반화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마치 누군가가 나의 슬픔을 훔쳐 가버리는 것 같아서이다. 



누군가의 슬픔과 고통이 수치화, 계량화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깊은 진심과 오랜 추억을 무시해버리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슬픔에 빠진 이에게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할까. 


“남에게 밧줄을 던져줄 때는 반드시 한쪽 끝을 잡고 있어라”
- 론 마라스코 · 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112쪽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메리는 더 좋은 곳으로 갔어요”라고 한다면, 

이때 이 사람은 밧줄의 반대쪽 끝을 잡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선함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느낄 것이다. 

그 ‘선함’은 상대방의 슬픔을 자신의 방식으로 가늠하여 멋대로 ‘해결’해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질적인 태도이다. 

이는 말 그대로 인간 사이의 진정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걱정 말아요. 괜찮을 거예요"라고 한다면, 

이 사람 역시 붙잡을 수 없는 밧줄을 던지는 것이다. 

스스로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괜찮을 거예요”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반면에, “당신이 스코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겠어요”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말이다. 

누군가가 다른 쪽 끝을 잡고 있으리라 믿고 붙잡을 수 있는 밧줄이다.


“밤새도록 휴대전화를 쥐고 있을게요. 당신 전화번호가 뜨면 언제라도 받을게요”라고 말해준다면 한결 더 낫다. 

이는 그 사람이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또 할 수 있는 일이다. 신뢰해도 되는 밧줄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생각한다. 

우리는 ‘나의 일, 내 가족의 일’이라는 경험과 상상을 통과해야만 성립 가능한 것이 ‘공감’의 형식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공감’은 기쁨은 물론 슬픔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출발점이자 가장 큰 바탕이다. 

그리고, 이 공감능력을 작동시키는 가장 핵심적인 조건은 다름 아닌 육친성, 근친성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슬픔의 감정은 나와 대상 사이의 가까움의 정도에 따라 작동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육친의 슬픔’이라고 이야기되는 ‘보편적인’ 슬픔의 형식이 아니라면 그저 추상적인 슬픔의 형식에 머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도 대상과의 거리를 재단, 계량하도록 함으로써 고통의 서열화, 위계를 견인할 위험은 없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당사자, 특히 피를 나눈 친족이 아니면 ‘애도의 공동체’의 (진정한 의미의) 일원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슬픔은 응당 느껴야 할 도리일까, 개인의 경험적, 선택적인 감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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