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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데 미안하고, 미안한데 좋고 딱 그런 하루였다.’
아내가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고 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내는 여행 가는 걸 좋아한다. 나는 반대로 여행 가는 걸 싫어한다는 아니고 귀찮아한다. 해서 난 혼자일 때 어디 특별히 여행을 가 본 적이 없다.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의 귀찮음에 더해 어딜 가서 무엇을 보든 그 감흥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는 감흥은 있지만 그 감흥을 온전히 담아 올 수 없는 실망이 커서 여행을 안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아내를 만나 거의 완벽한 짐꾼이 됐다. 난 정리하고 치우는 걸 좋아하고 잘하는 편이다. 그 역시 귀찮으면 아무것도 손을 대지 않지만 한 번 손을 대면 나름 잘 치우고 잘 정리하는 편이다. 이런 나의 성향을 십분 발휘해 아내와 여행을 준비할 때 모든 짐은 내가 싸고 정리하고 여행을 마무리할 때도 다 챙겨 온다. 아내는 전적으로 여행일정을 짠다. 80~90% 정도 아내가 여행 일정을 짜면 나는 나머지 부분 중 꼭 같이 공유해서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부분만 같이 논의하고 선택하는 편이다.
짐을 싸는 걸 잘하고 좋아하는 걸 더해 운전하는 것도 좋아한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 조금 힘에 부치지만 그래도 아직 운전하는 맛이 괜찮다. 해서 우리 부부는 완벽하게 합을 이뤄 여행 준비를 한다. 딸아이야 뭐 아직 어린 꼬꼬마니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아내와 늘 같이 여행을 다녔다. 아이가 생긴 이후엔 늘 세 가족이 같이 여행을 다녔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빠지는 여행이다. 바로 아내와 아이 그리고 아내 친구와 역시 친구의 아이 이렇게 네 명이서 하는 여행이라 난 빠지기로 했다.
여럿 있는 아내의 친구 중에 나에게도 나름 의미가 있는 친구다. 잘 알고 자주 만나고 해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아내와 내가 사귀기 전에 같이 여행을 다녀온 친구로 아내와 내가 사귀는 데 나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조를 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가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간간히 할 때 더 관심이 가는 친구이기도 하다. 바로 그 친구와 여행을 가기로 했다. 아내도 그 친구와 거의 8년 만에 여행이다. 나와 사귀기 직전에 가고 이번이 처음이니 맞을 것이다. 그때는 아내도 그 친구도 모두 미혼이었으나 이제 모두 한 남자의 아내가 됐고 또 귀여운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
우리가 먼저 결혼을 했는지 그 친구 쪽이 먼저 결혼을 했는지 긴가민가한데 우리와 그 친구의 아이는 같은 해에 태어났다. 물론 그 친구의 아이는 연초에 우리 아이는 연말에 태어나서 차이가 상당하지만 동갑은 맞다. 지금이야 아직 어리니까 차이가 크지만 나중에 충분히 친구로 지낼 수 있는 사이다.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를 서로 사진 등을 통해 공유하며 같이 키워 나갔다. 그렇게 사진으로만 보던 아이들도 이번에 만나게 됐다. 아이들이 온전하게 인식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엄마 친구의 딸인데 자기랑 동갑인 역시 친구인 그런 사이다.
이런 여행이기에 난 함께 할 수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던 건 아니다. 아내와 결혼 후 늘 언제나 항상 아내와 함께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아이도 함께 같이 여행을 다녔는데 이번엔 친구들끼리의 만남이라 함께 하지 않기로 했다. 함께 하지 못해 서운하거나 그렇진 않았다. 만남의 성격이라는 게 있는데 내가 끼면 결혼을 해서 아이가 생긴 아주 달라진 상황이긴 하지만 간만에 친구들끼리 회포를 푸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했다.
다만 아내와 딸아이 둘만 달랑 타지로 보내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청주인데 차라리 멀리 저기 부산이나 강원도 같은 곳을 가면 기차를 타고 가서 조금 마음이 놓였을 텐데 같은 충청도인 대천에 가기로 해서 기차를 타기 조금 애매해 버스를 타고 가기로 아내는 잠정적으로 결정을 했다. 버스라... 못해도 2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인데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지만 짐이 없는 것도 아닌 상황에 아이를 돌보면서 간다는 게 영 힘들 거 같고 불안했다. 아이도 장시간 버스를 타 본 적은 없어서 잘 버틸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었다.
고민을 하다 어차피 쉬는 날 움직이는 거고 그렇게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니 내가 데려다주고 데려 오기로 했다. 2시간 정도 달리면 되는 거리라 그냥저냥 왔다 갔다 괜찮을 거 같았다. 그렇게 하는 게 내 속이 편할 거 같았다. 무슨 일이야 있겠냐 만은 또한 내가 함께 한다고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뭐 엄청나게 대단하게 대응할 수 있겠냐 만은 같이 있지 못한 상황에서 속수무책으로 발만 동동 구르는 일은 없었으면 해서 장거리 택시 기사가 되기로 자청했다.
아내는 당연히 좋아했다. 본인도 간만에 친구 만나러 가는 길이라 즐거웠지만 아이와 함께 많지 않지만 여하튼 짐을 들고 버스를 타고 왔다 갔다 하려니 내심 걱정이 컸던 거 같다. 데려다주는 길에 아내의 친구는 기차를 타고 온다고 해서 기차역에서 태워 숙소까지 같이 가기로 했다. 내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아내 친구도 기차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기로 했을 텐데 여하튼 이래저래 나 한 명 움직이면서 조금씩 편해진 그런 여행이었다.
아내와 아이를 태우고 운전을 하면서 그런데 이거 이렇게 가면 혹시 이왕 온 길에 같이 놀다 가자고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하지만 나에게도 나름 계획이 있었다. 나 역시 결혼 후 거의 처음으로 혼자 보내는 1박 2일이었기 때문에 준비한 것들이 있었다. 대단할 건 없고 카드 포인트로 살 수 있는 피자 한판 사고 맥주 사서 먹고 마시며 보다 만 드라마와 영화 한 편 보고 자려는 계획이었다. 아이가 없으니 이어폰 없이 그냥 보는 나름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기 위한 준비를 했다.
2시간 정도를 달려 대천 역에 도착해 아내 친구를 태우고 숙소로 향했다. 체크인을 하고 숙소로 올라가 짐을 내리고 인사하고 나오려 했다. 아이들과 함께 묵을 수 있는 ‘뽀로로 방’이라고 해서 방 구경을 조금 하고 이내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내와 아내 친구가 저녁 먹고 가라고 잡았다. 당시 시간은 오후 4시, 내 계획에 의하면 난 인사를 하고 나와 다시 2시간 정도를 달려 청주로 와 맥주와 피자를 사고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고 저녁 7~8시경부터 피자와 맥주를 먹고 마시며 드라마를 보고 설거지도 좀 하고 집도 치우고 샤워를 하고 2차로 다시 맥주와 같이 사 온 과자를 먹으며 영화를 마저 보고 한 새벽 2시 정도에 자려했다.
그런 나를 잡았고 나는 일단 잡혔다. 이게 또 잡는데 그냥 나오기가 영 민망하고 미안해서 연신 거절을 하다 마지못해 그래 저녁이나 먹고 가자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내와 아내 친구는 뭘 먹고 싶냐고 하기에 괜찮다 아무거나 괜찮다 하고 먹고 싶은 거 시켜라 하고 휴대폰을 보면서 기다렸다. 아내와 아내 친구는 한참 회가 좋을까 치킨도 한 마리 시킬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갑자기 이번에도 역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혹시 너무 잡았냐며 나름 혼자만의 계획이 있는데 잡은 거냐며 그럼 그냥 가라고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난 다시 멋쩍게 웃으며 그래 원래 계획대로 간만에 둘이 재미있게 놀고 나도 나름 세운 계획대로 움직일게 하면서 결국 돌아 나와 집으로 향했다. 한 30여 분을 달리다 에이, 그냥 같이 저녁은 먹고 올 걸 그랬나? 하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또 저녁을 먹고 나면 맥주나 한 잔 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거 같고 그럼 결국 그냥 같이 자고 올 거 같은 모습이 그려졌다. 공교롭게도 숙소의 방은 2개나 다름없어서 나 한 명 더 껴서 잘 수 있는 공간도 충분했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어~ 하면 그냥 주저앉을 거 같아 돌아 나오길 잘했다며 재차 속력을 올려 청주로 내달렸다.
원래 계획이 있었지만 사실 그 계획이란 게 엄청난 것도 아니고 같이 저녁 먹고 술도 한 잔 하고 자고 오면 나도 편한 건 맞다. 그런데 나름 결혼 후 특히 아이를 낳아 키운 이후로 거의 처음 맞이하는 혼자만의 밤이라는 유혹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예상보다 출발시간이 1시간 정도 늦어져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처음 계획은 저녁 6시 도착이었는데 1시간 정도 밀려 7시에 도착했다. 마트에 가서 맥주와 과자 그리고 이왕 하루 편하게 노는 거 조금 더 먹자 해서 평소엔 비싸서 사지도 않는 소시지도 하나 샀다. 살 걸 다 사고 아주 복잡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카드 포인트로 피자를 포장주문하고 찾으러 갔다.
예정대로 왔으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침에 나가면서 두고 간 설거지를 먼저 하고 샤워를 하고 먹으려 했다. 하지만 시간도 밀리고 그러면서 배도 더 고파져 일단 먹기로 했다. 피자와 맥주를 먹으며 드라마를 봤다. 그것도 이어폰 없이! 피자도 좋았고 맥주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이어폰 없이 본 드라마였다!!! 한 편인가 두 편 정도를 보고 혼자만의 1차를 마무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하면서 2차를 준비했다. 2차라고 크게 다를 건 없고 역시 맥주와 같이 사 온 과자를 먹으며 영화를 보는 거였다.
그전에 워밍업 차원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이거 저거 확인하고 유튜브를 먼저 조금 봤다. 확인할 거 다 하고 유튜브도 볼 만큼 보고 드디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를 봤나 싶을 때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고 시간도 꽤 늦어 아이고~ 하면서 자기로 했다. 다음 날 다시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기 때문에 혼자만의 밤이라고 마냥 늦게 잘 순 없었고 애초에 딱히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럼에도 뭔가 아쉬워 일단 조금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볼까 하는 마음에 거실의 불도 영화를 보던 노트북의 모니터도 모두 켜 놓고 누웠다.
일어나 보니 아침 7시 30분 정도였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불을 끄고 배터리가 다 나가 이미 꺼진 노트북도 덮고 다시 잠을 청했다. 10시 정도에 일어나면 될 거 같았다. 하지만 잠은 다시 깊게 들지 못하고 그저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마저도 요즘 몸이 너무 쑤셔서 마냥 편치 많은 않았다. 결국 10시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어제 먹다 만 것들을 치우고 화장실도 다녀오면서 씻고 정리할 거 조금 하고 다시 아내를 데리러 갔다.
전 날 다녀오고 다시 다녀오는 길이라 그런지 길도 익숙했다. 신기한 건 110Km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내비게이션은 그중에 10Km 남짓만 고속도로를 타게 안내를 해 줬다. 이게 맞는 건가 싶으면서도 국도에 차가 별로 없어 이게 맞겠구나 하면서 나름 신나게 달려갔다 달려왔다. 오는 길에 아내와 딸아이는 피곤했는지 거의 2시간 내내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