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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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이다. 여행을 가는 날이다. 가벼운 여행을 가는 날이다. 조금 특이한 점은 아내와 딸아이만 가는 여행이다. 보다 정확히는 아내와 딸 그리고 아내 친구와 딸 이렇게 넷이 가는 여행이다. 엄마끼리 친구 그리고 그들의 딸아이들도 여섯 살 동갑내기 친구인 네 명의 여행이다. 내 역할은 아내와 딸아이를 여행 장소로 데려다주는 것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다. 천안에서 만나 숙소까지 모셔다 드리고 숙소를 구경하고 나왔다. 내가 하는 여행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숙소 구경은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에 빠트리지 않았다. 더불어 나도 함께 하고 싶다고 하면 아내와 아내의 친구는 기꺼이(?) 그러라고 하겠지만 난 예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딸아이에게 아쉬운 인사를 건네며 나왔다.
혹시 빠트린 게 있어 아내가 전화를 할까 싶어 주차장에 잠시 앉아 있다 청주로 출발했다. 일차적인 목적지는 집이 아니다. 하루를 혼자 보내야 해서 나름 계획을 세운 게 있다. 술을 좋아라 하는데 여섯 살 딸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혼자 좋다고 양껏 술을 마시러 다닐 수는 없다. 해서 오늘 같은 날 한 번 마음먹고 집 인근에 있는 술집에 혼술을 하러 가기로 했다. 세 곳 정도를 점찍고 괜찮은가 검색을 해 봤는데 결과적으론 모두 안 가기로 했다.
혼자 술 마시는 게 부담스럽진 않은데 다들 안주가 너무 비쌌다. 내 마음속의 물가상승률은 상당히 더디다. 일할 때 자주 입는 단추 있는 긴팔셔츠는 2~3만 원, 역시 일할 때 자주 신는 컨버스화를 3만 원 정도에 사는 나에게 3만 원을 훌쩍 넘어가는 안주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같이 간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혼자 가서 그 돈을 쓸 일은 아닌 거 같았다. 나이가 들어도 사람 마음은 이팔청춘이라고 하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내 마음속의 물가는 이팔청춘에 머물러 있는 게 확실하다.
해서 플랜 B를 가동했다. 오늘 반납을 해야 하는 책이 있어 미리 챙겨 왔는데 그 책을 카페에서 마저 읽고 반납하기로 했다. 목적지를 카페로 잡고 출발했다. 그런데 요즘 책을 참 안 읽는 거 같긴 하다. 읽고 반납하려는 책은 다름 아닌 만화책이다. 만화책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일반 활자 책에 비해 텍스트의 양이 적은 그 만화책을 3주 간이라는 대여 기간 동안 읽지를 못하고 반납하는 날이 되어서야 겨우 읽어 볼까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에 드라마로 방영이 된 ‘파인’인데 드라마 방영에 맞춰 최근 원작이 세 권으로 재출간돼 빌렸는데 한 두어 달이 지난 지금도 다 못 읽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문득 가려고 하는 카페와 책을 반납해야 하는 도서관이 멀다는 사실이 스쳤다. 아... 그럴 거면 굳이 카페에 갈 필요가... 해서 목적지를 도서관으로 바꿨다. 도서관에 도착해 도서관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차에 앉아서 못 읽은 부분을 다 읽고 겨우 반납했다.
책을 반납하고 나니 딱 저녁시간이 돼 평소에 먹고 싶었던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 패티 두 장에 치즈가 잔뜩 들어간 햄버거는 충분한 만족감을 줬다. 배도 마음도 충분히 찬 상태에서 아내와 딸아이가 없는 외로운 밤을 달래기 위한 맥주의 친구를 사러 마트에 갔다. 평소에 자주 가는 마트는 아닌데 오늘 이동 동선 상 가까웠고 그 마트에서 파는 피자가 맛있어서 피자를 사러 갔다.
세 가지 맛의 피자를 팔고 있는데 그 세 가지 맛의 피자를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세 조각짜리를 사려고 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다 팔렸는지 매대에 없었다. 그렇다고 돌아설 수는 없어 주변을 둘러보다 맥주 안주의 스테디셀러(?)라 할 수 있는 소시지에 눈이 갔다. 소시지를 산다면 바늘에 실이 따라오듯 나초도 사야 했다. 평소에 즐겨 먹는 나초까지 샀다. 이제 다 됐나 싶은데 뭔가 조금 아쉬웠다. 그러다 이전에 눈여겨봤던 크림빵 한 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오늘이다 싶어 크림빵까지 사 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갑자기 와인 생각이 났다. 난 얼마 전에 와인하고 안 맞는 거 같다는 생각으로 이제 가급적이면 와인은 마시지 말자하고 생각을 정리한 적이 있었다.(마시면 마시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뭘 정리까지... 쓰고 보니 웃긴 거 같아 부연했다.) 그런데 한 번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었다. 집으로 향해 가는 내내 와인 생각이 났다. 집에 도착할 즈음 에이, 일단 한 번 보기나 하자하고 집 앞의 슈퍼에 들어갔다. 와인 매대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맛이 있을까? 어차피 한 병 사 봐야 두어 잔인데 살까? 아니야 한 잔 마시고 별로라고 생각할 텐데, 이 생각을 무한 반복으로 돌리다 결국 돌아 섰다. 그래, 아쉬우면 맥주 한 캔을 더 마시면 되지!
사랑하는 여보 마누라 그리고 사랑하는 구여운 딸내미 잘 자요. 내일 데리러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