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rah J Sep 02. 2021

무꽃의 낭만을 먹다


화창한 날의 주말 아침, 어젯밤 블라인드를 닫아놓지 않은 탓에 아침해가 삐죽이 들어와 단잠을 깨운다. 이미 몸은 평소의 기상시간을 기억하고 먼저 자연스럽게 깨긴 했지만, 그래도 주말이니 나는 억지로라도 잠을 더 청해보려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렇게 침대에서 뒤척이는 것도 잠시, 게으름을 부려보고 싶은 마음보다는 생활리듬에 맞춰 움직이려는 몸이 더 앞선다. 나이가 들었나 보다.





무꽃 아련한 보랏빛

느지막이 아침을 준비하러 내려갔더니, 식탁이 환하다.

남편이 무꽃을 보여주려고 가져왔단다.

좀 더 잘 수 있도록 창문의 블라인드를 닫아주었던 남편은 그 길로 일어나 뒷마당 텃밭에 나갔던 모양이다.

무꽃은 처음 보는데 색이 아주 곱다.

아련한 보랏빛.

그 옆에는 꽃님이들이 가져다 꽂아둔 무꽃. 엄마 선물이란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아침부터 가족들에게서 꽃 선물을 받는다. 무꽃의 낭만으로 기분 좋은 아침시간.


그나저나

무꽃의 고운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채소에 꽃이 피었다는 것은 그 끝이 보인다는 의미인지라.

우리가 심어두었던 무를 수확하기 전인데, 꽃을 피기 시작했다면 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초보 텃밭지기인 우리에게 무꽃이 주는 의미는 연보랏빛의 아련한 낭만을 즐기는 것뿐 아니라 무의 수확시기를 놓쳤다는 안타까움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한국과 밴쿠버에 네 번의 계절 변화가 있다는 것은 같지만, 내가 지내왔던 한국에서의 계절과 밴쿠버에서의 그것은 기후특성이라는 면에서는 다르다.

밴쿠버의 여름은 아침과 저녁에 서늘하고, 한낮에는 뜨거운 햇살로 텃밭의 온도가 아주 높이 올라간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렇게 큰 기온차가 있는 곳은 무를 키우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하니 밴쿠버에서 무를 키우려면 비닐하우스(greenhouse)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텃밭에서 무를 키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일까.


우리처럼 초보 텃밭지기가 아닌 농사를 업으로 하는 경우에도 무꽃을 피우기는 한다. 보통은 씨를 받기 위함이라고 하니, 내년을 기약하며 우리도 씨를 받아보자는 긍정의 마인드를 가져보기로 했다. 그리고, 어여쁜 무꽃을 눈으로 즐기고, 입으로도 즐기는 것으로.





무는 뿌리를 먹는 채소지만, 무의 잎 부분인 무청도 좋은 식재료가 된다.

무꽃을 처음 보지만, 무꽃도 음식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무꽃은 어떤 맛일까.


고기를 먹을 때 쌈채소로 먹으면 그 알싸한 맛이 마치 고추냉이를 연상시킨다. 무꽃이 달린 줄기는 연하기 때문에 쌈장에 찍어먹어도 좋고, 겉절이 양념으로 무쳐먹어도 무척 맛있다. 고기 요리와 참 잘 어울린다.


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진달래 화전 외에는 낯설다. 그런데 무꽃을 먹어보니 무맛이 나는 것이 한식의 재료로 충분히 활용 가능한 어여쁜 채소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갖은 채소를 넣어 만드는 비빔밥에 시원하고 아삭한 무생채를 만들어 넣는 것처럼 무꽃을 고명으로 올리면 살짝 매콤하게 톡 쏘는 맛이 개운하다. 무꽃의 연보랏빛 고운 색이 비빔밥의 격을 높여주기까지 한다.


풀을 쑤지 않고 만드는 여름 깍두기에 무꽃을 다져 넣으면 무청을 넣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무꽃의 부드럽게 매콤한 맛이 깍두기 양념과 조화를 이루어 깔끔한 맛을 보태준다.








씨앗을 발아시켜 새싹부터 고이고이 땅 속에서 키워낸 무. 흙의 영양분과 햇빛 에너지를 받아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하니 뿌듯하기까지 했다. 무 뿌리가 제법 커지기 시작하면서 무가 자꾸 땅 위로 솟아올라 흙으로 덮어주기를 몇 번 반복했었다. 조금이라도 더 큰 무를 거두고 싶었던 우리의 욕심과 달리 이미 땅 속에서의 자람이 끝났다는 신호였나 보다.

결국 무에 뿔이 나고, 그 뿔을 따라 꽃이 피었다.

마치 늠름한 수사슴의 뿔처럼 꽤 단단하고 멋들어지게 솟았다.

무청도 튼실하게 달렸다.

무꽃은 여전히 아련하고 어여쁘다.

정작 무는 너무 못생겼다.







자그마하고 소박한 생김새의 무꽃.

무꽃의 꽃말이 '계절이 주는 풍요'라니 가녀린 겉모습에서 상상할 수 있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꽃이 한창 피어났을 때를 떠올려보니 풍요라는 말이 어울리기도 한다. 무꽃이 한 번 피어나기 시작하니 삽시간에 무성하게 자라났다. 올해는 자연농법으로 텃밭을 가꾸겠다며 김매기를 많이 하지 않아 풀숲을 이룬 텃밭에 연보랏빛의 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으니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풍경 속 주인공을 찾아 나비가 날아들었다. 흰나비, 호랑나비.

무꽃이 피어나는 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풍요로움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어여쁜 꽃의 모습을 보며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낭만,

그것에 더해 무꽃의 향연이 불러 모은 나비까지 바라볼 수 있는 기쁨,

게다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재료로써 사용되어 우리의 식욕을 채워주는 식탁의 풍성함까지.


보통 무는 무꽃이 피기 전에 음식의 재료로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꽃을 흔히 볼 수 없다. 무의 뿌리와 줄기가 영양을 채우고 나면 생명의 터전인 땅에서 뽑혀 나가야 하는 무의 숙명. 그래서 무꽃은 작은 꽃잎 네 장을 곱게 피울 수 있는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 올해 우리 텃밭에 탐스럽고 무성하게 자라난 무꽃은 엉겁결에 얻은 기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뿌리와 줄기 다음 순서인 마지막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있어야 마주할 수 있는 결실이 무꽃이니 말이다.


무를 키우는 것에 대한 배움과 준비가 부족했던 초보 텃밭지기였던 우리.

애초에 기대했던 무는 얻지 못했지만 무꽃이라는 긍정적인 신세계를 맛볼 수 있었다.

연보랏빛 무꽃의 맛있는 낭만을 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텃밭의 은은한 향기, 참나물을 요리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