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삼삼팔 Oct 29. 2022

퇴사를 하고 싶었는데-1



한 달 전쯤인가 전화 사주라는 걸 봤다.

평소에도 재미로 사주를 봐왔던 터라 엄청난 미래를 알게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주를 본 건 몇 년을 고민하던 걸 끊어내고 싶어서였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는지가 4년째 궁금했다. 그만둬야겠다 결심하고 일정을 잡아두면 곧 불안감이 엄습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돈벌이가 없는데도 잘 살 수 있을까? 하루만 집에 있어도 심심해서 괴로워하는 내가 쉬는 게 맞는 걸까? 다른 회사에 취직을 또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실 이건 별 생각이 아니라, 퇴사 전에 당연히 고민하고 대비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기본적인 미래조차 대비하지 않은 상태로 퇴사를 하자니 당연히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던 것이고, 그럼에도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직 다니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긴 들었다. 그럼 퇴사를 왜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자. 출퇴근 왕복 3시간이 힘들어서? 사실 그것도 맞다. 그런데 주 이유는 아니었다.


의미 없이 쳇바퀴 돌듯이 흘러만 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퇴사를 한다고 다르게 시간을 쓸 방도도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아까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뒤돌아봤을 때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었다. 2021년에는 무얼 했지? 2020년에는? 결혼을 했지, 그럼 2019년에는? 글쎄.. 2018년엔? 2017년엔? 기억에 남은 장면이 결혼한 이벤트 단 한 가지였다. 회사에서 나는 어땠는지, 어떤 것을 일구어 내고, 어떤 실수를 했고, 어떤 걸 느꼈는지 단 한 가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게 무서웠다. 나는 열심히 헐떡이며 쉬지 않고 삶이란 길을 달리고 있는데, 한 걸음 내딛으면 디뎠던 길이 바로 절벽으로 사라져 버리는 레이싱을 하는 듯했다. 이런 걸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되는 걸까 의문스러웠다.


퇴사를 하고 싶었는데 그만한 용기가 없어서 4년 만에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 팀의 이동이었다.

나는 성인 수험서 편집자이다. 말이 편집자지 교재 기획부터 원고 발주, 원고를 받아서 수정하고 저자와 소통하고, 외주자를 관리하며, 직접 교정을 보고, 마케팅 방안도 생각하며, 서점에 올라갈 정보도 마케팅팀에 써 준다. 제작을 위한 의뢰서도 쓰고, 디자인도 발주하고 확인하며, 수익률 계산을 위한 비용도 머리 굴려 최소화시킨다. 이건 편집자가 아니지 않나 싶지만 어느새 그러려니 하며 일하고 있었다. 편집자가 교정만 봐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적당한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여긴 선이 없다. 사실 선은 내가 입사했을 때부터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교재 담당자의 기획 의도가 살아 있을 수 있었고, 콘텐츠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다. 제 업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팀의 업무를 떠다 맡으며 일방적인 지시를 따라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일명 '현타'가 하루 걸러 느껴지는 이 팀에서는 더 이상 버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내가 만든 교재를 사용할 수험생들을 생각하며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우리 팀원들은 그렇지 못하다.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실망스러울 수 있겠으나 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기계 속 한낱 부품 취급을 받았고 딱 그정도에 불과했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말고, 도와주라면 도와주고 반문이 곧 도전이라 여겨지는 그정도 취급을 받고 있다. 시장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지 없는지가 교재를 출간하는 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고, 그 때문에 비용 최소화가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가장 쉽게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외주 교정비를 없애는 거다. 그 많은 페이지의 교정을 모두 내가 홀로 봐야 한다는 것, 페이지가 어떻게 틀어지고 얼마나 많은 원고를 대조해야 하는지는 상관 없이 외부의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지 못한다는 것, 그럼에도 당연히 정오 사항은 없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1달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그게 잡스러운 업무들 외에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상사에게 이 부당한 처사를 이야기하는 것? 의미 없었다.

실무를 해봤다면 절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없어야하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렸다. 알면서도 우리에게 그러한 요구를 해왔다. 그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거 알고 있지만, 어쩌겠어'라는 치사한 변명밖에는 들을 말이 없다는 거다. 실무자들끼리 지지고 볶아 보란듯이 일을 잘 처리하면 '그래, 봐, 할 수 있잖아'라는 생각을 하겠지. 상명하달, 지시의 번복, 지겨웠다.


아무튼 그래서 다른 팀으로 이동을 신청했다.

물론 무작정 신청한 건 아니다. 난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고 생각이 너무 많아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다. 즉흥적인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나와 파트의 업무 일정을 모두 고려하여 신청했다. 몸서리치며 팀을 옮기려는 찰나에도 나는 가능한 일정을 요구했다. 바로 이동시켜달라는 애 같은 요구같은 게 아니었다. 3월에 면담을 신청하고 6월에 있는 큰 아이템까지 책임진 후 인수인계 후 7월에 이동할 수 있게 해달라 요청했다. 그럼에도 한 사람이 빠진다고 하니 상사는 좋았을 리 없다. 11월에 복귀하는 육아휴직자가 있으니 12월까지 기다려보고 그 후에도 이동을 하고 싶다면 다시 신청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미 1년 전 팀 이동을 신청한 적이 있었지만 똑같은 패턴의 말을 듣고 지금껏 버텨왔었는데. 더는 못 버티겠다 싶어 이동 시점을 조금 당겨달라고 다시 이야기했다. 그 말에 상사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 못 견디게 싫냐'는 말을 했다.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9개월을 더 버티라는 말은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일정을 당겨달라는 내 요청을 윗선에 보고해보겠다는 말을 믿고 그저 기다렸다. 그런데 정말 황당했다. 상사는 윗선에 나의 의견은 단 한마디도 전하지 않았다. 내가 이동하고 싶은 팀의 총책임자와 친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 말을 맞춘 것인지 그저 '12월에 팀 이동을 원한다'는 말만 보고한 듯했다. 이미 내년 1월에 팀을 이동하라는 오더를 받아두고는 그대로 통보했다. 내가 이동할 팀의 상사도 내 의견은 전달받지 못한 채 1월에 이동한다는 것만 통보받았다고 했다. 더 얘기할 힘도 없었다.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 나는 퇴사를 고민했다.


기다려서 팀을 이동할 것이냐, 다 싫다 퇴사를 할 것이냐

이 고민이 전화기를 들게 만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쟁이가 되고 싶은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