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시티 편견 깨기
- 편집샵 거리와 엘모로 츄러스
우리의 숙소는 멕시코시티의 '소나로사 (Zona Rosa)' 근방에 있었다. 이 지역은 트렌디한 가게들과 술집, 펍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분위기가 신사동이나 홍대와 비슷하다는 후기들이 꽤 있었다. 실제로 거리를 걷다 보면, 얼핏 지나친 술집이나 펍은 홍대의 시끌벅적함을 떠올리게 했지만, 우리는 주로 편집샵 위주로 돌아다녔기에 좀 더 신사동 거리에 가까운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숙소 주변을 걷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게 있었는데 — 바로 이상하리만치 많은 한식당과 한식 술집이었다. "멕시코시티 한국하고 똑같네~"라며 웃어넘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소나로사는 멕시코시티 한인촌이 위치한 지역이었다. 즉 멕시코 내에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가장 쉬이 접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이곳에서조차 우리는 한국인을 많이 보지 못했다. 그만큼 멕시코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마주친 일이 거의 없었다.
멕시코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방문한 관광스팟은 레포르 (Reforma) 대로 한복판의 "천사상 독립기념비 (Angel de la Independencia)"였다. 이 조형물을 중심으로 레포르마 대로가 멕시코시티를 가로지르고, 도로 양 옆으로는 수많은 고층 빌딩들이 줄지어 서 있다. 우리나라의 종로나 광화문이 떠오르는, 말 그대로 도심 한복판이었다. 기념비는 멕시코시티의 상징 중 하나로, 만남의 장소로도 많이 쓰인다고 한다. 우리가 머문 숙소도 이 천사상에서 도보 5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기에, 멕시코시티에 머무는 내내 수도 없이 이 앞을 지나쳤다. 아쉽게도 공사 중이긴 했지만.
천사상을 찍고 원래 가려던 편집샵으로 향하는 길. 가는 길에 워낙 이곳저곳 둘러봐서, 금세 2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점심으로 먹은 타코가 얼추 소화가 된 찰나, 마침 낯익은 상호명의 가게가 눈에 띄었다. 바로 ‘엘 모로(El moro)’라는 츄러스 가게였다.
J는 멕시코에 와서 츄러스가 꼭 먹어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이미 블로그 탐색을 통해 이곳이 유명한 츄러스 맛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애매한 시간 덕분일까? '맛집 = 웨이팅'이라는 상식과는 다르게 가게는 텅텅 비어 있었다. 모든 상황이 딱딱 맞아떨어졌기에,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츄러스 하나와 초코디핑, 그리고 아메리카노를 주문했고, 가게에서 먹고 가기 위해 2층으로 올라왔다. 둘 다 지나치게 단 걸 좋아하지 않아서 설탕은 묻히지 않았는데, 역시나 옳은 선택이었다. 츄러스는 놀이공원에서 파는 것처럼 겉이 바삭딱딱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스페인에서 먹었던 말발굽 모양의 츄러스에 조금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애초에 츄러스를 찾아다닐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아서 큰 기대는 없었고, 역시나 특별히 맛있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 J의 후기가 더 객관적일텐데, 나쁘지는 않았다는 평이다.
- 여기는 신사동? 연남동?
츄러스와 아아로 기력을 회복한 후, 소나로사부터 로마노르떼까지 이어지는 편집샵 골목 곳곳을 구경했다. 도로 양옆으로 줄지어 선 커다란 가로수들이 줄기와 잎들을 기다랗게 늘어뜨리고 있는 풍경은, 마치 신사동 가로수길을 떠올리게 했다.
실제로 이 지역은 멕시코시티 내에서도 가장 트렌디한 지역 중 하나로, 서울로 치면 홍대~ 연남동, 혹은 신사동에 비견된다고 한다. 그 중 딱 어느 한 곳과 닮았다고 꼽기는 어렵지만, 한 블록 한 블록 넘어갈 때마다 우리는 연신 ‘여기는 신사동!’, ‘여기는 연남동!’을 외쳤다. 마치 게임하듯 우리가 아는 서울 동네와 닮은꼴을 찾아가는 사이, ‘멕시코시티’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 하나씩 흐릿해져갔다.
‘멕시코시티에 간다’ 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마약이나 불안한 치안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우리가 첫 날 마주한 멕시코시티는 한국의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은, 트렌디한 가게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물론 관광지 한정일수도 있지만, 거리에는 제복 입은 경찰들이 많이 보여서 치안이 불안하다는 느낌은 별로 받지 못했다. 물론 우범지대는 분명히 있고, 밤 늦게 돌아다니는건 피하는 것이 좋지만 — 생각보다 ‘실제의 위험’보다는 '이미지가 만들어낸 두려움'이 더 많은 것 같다.
첫 날 방문한 편집샵들에는 토속적인 멕시코 감성이 물씬 담긴 물건들이 많았다.
이 날엔 그저 예뻐 보이기만 했던 하트, 선인장, 해골 등의 상징적인 오브제들이, 열흘간의 여행을 마치고 나니 하나하나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 Q' Pedro Pablo / Café de especialidad y Cerveza artesanal
편집샵 거리를 구경하다가 우연히 힙한 펍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연남동 거리를 걷다 보면, 반지하와 2층 사이라는 애매한 층수 어딘가에서 작고 매력적인 가게들이 눈에 띄고는 한다. 그런 가게들은 순간적으로 이끌려 들어가야만 할 것 같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날도 딱 그런 느낌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Q’ Pedro Pablo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의 풀네임은 Q' Pedro Pablo / Café de especialidad y Cerveza artesanal. 직역하면 '스페셜티 커피와 수제 맥주 판매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때 멕시코에서의 첫 술을 마시기로 했기 때문에, 커피도 맥주도 아닌 가장 멕시코스럽다는 ‘메즈깔 (Mezcal)’을 샷으로 주문했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것 중 하나가, 이 메즈깔의 이름을 알아두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 한인투어 가이드분을 통해 알게 된 바에 따르면, 메즈깔은 멕시코 전역에서 생산되는 증류주로, 지역이나 브랜드에 따라 맛과 향이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 멕시코시티 술집에서 유통되는 메즈깔 종류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날 마신 메즈깔도 이후에 알려주신 두 가지 종류의 메즈깔 중 하나였을 거라고 하셨다. 하지만 분위기 탓이었을까 — 그 첫날의 감동은 여행 내내,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안주는 멕시코 전통요리인 엔칠라다(Enchilada). 멕시코 음식점에 가면 기본적으로 빨간 소스(Rojo)와 초록 소스(Verde)가 구비되어 있는데, 한국인 후기를 보면 대체로 '베르데' 소스를 선호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도 초반에는 베르데 소스를 주로 선택했다.
원래 한 접시에 4개가 나오는 메뉴인데, 사람이 둘이라 2개씩 나눠서 주셨다. 멕시코는 기본적으로 1인 1접시 문화라서, 한국에서처럼 메뉴 여러 개를 시켜 나눠 먹는 방식이 여기서는 흔치 않은 방식이다. 그래서 앞접시 없이 음식을 내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곳에서는 굉장히 친절하게도 따로 나눠서 주셨다.
음식은 한 눈에 봐도 정성들여 만든 요리인 것이 느껴졌다. 실제로 먹어봤을 때도 흠잡을 데 없이 꽤 잘 만든 요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첫날의 이 엔칠라다를 포함해서, 이번 멕시코 여행에서 식당에서 먹은 요리가 특별히 맛있다고 느낀 적은 많지 않았다. 스스로의 입맛이 까다롭지는 않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스스로도 잘 모르는 내 나름의 '맛있음'에 대한 기준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 부분은 철저히 개인적인 취향이고, J는 꽤 맛있었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동안 못다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니, 첫 잔이 어느새 다 비워졌다. 배도 애매하게 덜 찬 상태라, 추가로 파인애플 치킨과 칵테일을 주문했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말이 파인애플이지, 일반적인 닭튀김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술집에서 파는 메뉴가 수식어만 화려하지, 그 맛이 그 맛인 경우가 꽤 많으니까.
그런데 그 생각은 오산이었다. 파인애플이 정말 자기주장이 강했다. 차라리 곁들이는 소스가 칠리였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데, 하필 또 케찹. 닭튀김, 파인애플, 케찹—이 세 가지 맛이 모두 따로따로 노는, 오묘한 대실패였다.
칵테일은 메즈깔 베이스의 망고 칵테일과 모히또였는데, 우리 둘 다 메즈깔 샷이 더 맛있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두 번째는, 그냥 새로운 시도를 해본 데 의의를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첫 날의 일정은 메즈깔 칵테일과 파인애플 치킨으로 끝났고, 우리는 느릿느릿 숙소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았고, 생각보다 익숙했던 멕시코시티에서의 첫 날.
하지만 본격적으로 '멕시코스러움'을 느끼게 될 날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