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해 나는 점장이었다

어른 흉내를 내던 아이의 하루하루

by 지화


20대 초반의 젊은 점장 역할을 했던 편의점 A에서는,

어찌 보면 내가 20대 인생 중 유일하게 직책을 달고 일한 1년이었다.



매장을 맡아 운영하며 하루하루를 책임지는 삶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나도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1년 동안 별의별 일들이 있었고, 매일같이 새로운 감정이 내 앞에 놓였다. 흉기 난동은 여전히 자주 일어났고, 반말과 욕설은 기본이었다.

야외 테라스가 있는 편의점 A는 난간이 위험해서 아이들이 뛰어다니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그날도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들이 테라스 난간에 매달려 타잔놀이를 하고 있어 자제를 부탁했다. 몇 분 뒤, 아이들은 보호자로 보이는 엄마들과 함께 다시 들어왔다. 나는 늘 하던 대로 “어서 오세요” 인사를 건넸고, 그들은 별다른 표정 없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고 안경은 흔들리고 있었다.
바닥엔 쭈쭈바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뭔가 싶어 앞을 보니, 아주머니가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들, 잘했어”라고 했다.
아이는 “나 잘했어?”라며 웃었고, 옆에 있는 다른 어른들과 아이들도 웃고 있었다.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멈춰 있었고, 아주머니는 “학생, 계산 안 해요?”라는 말까지 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계산을 마치고, 그들이 떠난 뒤 문 종소리가 울렸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울음을 터뜨렸다.

또 어떤 날은, 중년 남성 손님들 무리에게 “W.C”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 몇 번 되묻자
“화장실이 어디 있냐고요!” 하고 짜증을 냈다.
그리고는 들으라는 듯이 “이래서 가방끈 짧은 애들은 안 된다니까”, “젊은 나이에 왜 저러고 살아?”, “서울에서 대학은 나와야지 말이 통하지” 같은 말을 했다.
나는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억울하고 슬펐지만, 그날도 계산대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나쁜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매장 뒤 학원에서 자주 오던 선생님들과 수강생들은 언제나 밝고 활기찬 얼굴이었고, 나와 비슷한 또래 여성분들은 올 때마다 응원처럼 따뜻한 말을 건넸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 위로받는 날들이 있었다.

어느 날은 30대 중후반의 여성분이 상품 관련 질문을 했고, 내가 대답을 드렸다.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산까지 마친 뒤, 조용히 명함을 건넸다.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일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혹시 나중에라도 생각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잠깐 망설이다가 받긴 했지만, 결국 연락은 하지 않았다. 그 명함은 오랫동안 지갑 속에 들어 있었다. 스카우트 제의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분이 보여준 정중한 호의는 그 시절 묵묵히 일하던 나에게 오랫동안 위안이 되어주었다.

함께 일했던 직원들 대부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나를 무시하거나 불쌍하게 보지 않았다.
항상 존칭을 써주었고, 어린 나이에 매장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에 “정말 대단하다”며 칭찬해 주었다.
그 따뜻한 시선들이 있었기에 나는 주눅 들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사춘기 딸을 키우던 직원은 어느 날 “선물이에요” 하며 활짝 웃으며 꽃 한 송이를 건넸다.
졸업식 트라우마로 꽃을 좋아하지 않던 나였지만, 그 꽃 한 송이는 내가 다시 꽃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키가 컸던 중년 남성 직원은 작은 일에도 “제가 또 하나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는 언제나 사소한 것에 감사했고, 그 마음을 바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투는 늘 진심이 느껴졌고,
나는 그에게서 '고마움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를 배웠다.

나와 이름이 같았던 직원, 도배 봉사활동을 알려준 점장님, 잠깐 스쳐 지나갔던 직원들까지,
모두 내게는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인연들이다.


함께 웃고 울었던 동료들과의 시간은 어느새 끝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곳을 그만두고 직원들과 함께한 송별회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날, 기분이 좋았던 한 직원이 “기억에 남는 하루를 만들어주겠다”며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성 손님들과 즉석에서 합석을 시도했다.
예상 밖으로 그분들도 흔쾌히 받아주었고, 우연히 시작된 합석 자리에서 우리는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마지막 밤을 따뜻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서툴고 외로웠지만 진심으로 매장을 지켰던 시간이었다. 그 시절이 있었기에 나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고, 내 감정을 더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견딘 그 시간들은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다. 그 모든 날들이, 결국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편의점 A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나는 그 이후에도 계속 편의점에서 일했다.
편의점 B, 편의점 C를 거치며
내 20대는 거의 내내 계산대 앞에 있었다.
그러니 이 이야기도, 아직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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