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세계
소개팅 자리가 마무리된 후 나눌 수 있는 적절한 인사말은 무엇일까? “오늘 즐거웠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느낌표와 물결의 문장부호를 추가하면? “오늘 즐거웠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느낌표가 두 개면 다를까? “좋은 하루 보내세요!!” 행여 물결이 다섯 번 붙어 넘실대더라도 전과 다를 바 없다고 승아는 생각했다. 친절은 때때로 매정하다. 당신의 안녕을 기원하지만 나와는 무관하다는 뜻이다. 그의 미래에 내가 놓일 수 있다면 물음표가 붙었겠지. “잘 도착했어요?”라거나.
오늘 승아가 만난 사람은 1950년대 미국의 멜로드라마를 좋아했다. 더글라스 서크라거나 빈센트 미넬리의 영화들을 즐겨본다고 말하는 그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잘 차려입은 재킷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베이지 색의 여름 재킷은 까끌까끌한 리넨 소재였는데 단정한 외모의 그와 제법 잘 어울렸다. 그는 종종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특정 행동을 되풀이하기도 했다. 얼마 전 라식 수술을 한 바람에 눈이 건조하다며 수시로 넣는 인공눈물도 그중 하나였다. 승아는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는 그 몰래 그가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를 보면서도 목을 뒤로 홱 제껴 인공눈물을 넣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메마른 눈알만큼이나 인사말도 건조했다. '조심히 들어가시고 남은 주말 잘 보내세요.' 승아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카톡 대화창에 남겨진 그의 마무리 인사를 곱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승아는 근처 새로 생긴 와인 샵을 발견했다. '와인 세계'란 간결한 상호명과는 달리 맥주와 위스키와 리큐르까지 구비된 주류 마트였다. 간판에 적힌 이름을 따라 말하던 승아는 갑자기 생경한 화가 치밀었다. 세계란 단어의 온도가 분통 터질 만큼 뜨뜻미지근해 보였던 것이다. 헤어지자마자 황급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남자의 마른 등처럼 말이다. 와인 세계라면서 온갖 주류를 다 파는 무신경함이라니.
생애 첫 소개팅을 했던 20살 적 보단 능숙해진 승아였어도 낯선 사람과의 첫 만남에서 사회생활로 단련된 가면을 벗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커피 두 잔을 앞에 두고 나란히 마주 앉은 두 남녀는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 검문소의 직원 같았다. 각자 여권을 꺼내 놓고 상대의 여권에 흠이 없는지 감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혼 적령기의 청년들은 결혼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결혼 시장에 나온 상품처럼 굴었다. 매대에 진열된 인형들이 그러하듯 두 사람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결혼할 생각이 없는 34살의 여자 이승아에게 결혼할 생각이 다분하다고 말하는 남자도 어려웠지만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34살 즈음의 남자도 그 나름대로 문제였다. 승아는 스스로가 모순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결혼할 생각이 없더라도 결혼은 하나의 측량 단위를 제공했다. 승아는 문득 삶의 중대한 미스터리를 목격한 기분이었다. 30대 중반을 앞두고 있는 34살 두 남녀의 순수한 연애가 가능할까? 34살이 연애를 한다는 건 무엇일까.
"30대의 연애는 안전해야죠." 승아는 얼마 전 직장 동료 영미 씨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데이팅 앱에서 만난 35살의 회사원과 연애 중이다. 간략한 자기소개글과 서너 장의 사진으로 서로를 파악하다가 마음에 든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상대가 수락하면 연결된다. 온라인 상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오프라인 약속도 잡는다. 영미 씨의 견해로는 오히려 서로의 신상이 분명하고 제삼자의 검토도 있어 안전하다는 것이다. "세상이 흉흉하잖아요."
와인 세계에 들어선 승아는 매장을 빠르게 훑었다. 예상했던 대로 매장 내부엔 와인뿐 아니라 각종 주류들이 또한 즐비했다. 승아는 황급히 와인들로 가득한 와인의 세상으로 발을 굴렸다. 커피잔에 커피가 동난 걸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시간을 확인하던 그 남자처럼. 소개팅에서 남자와 승아는 2시간 동안 서로의 신변을 살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업무 강도는 어떤지, 9to6인지, 주말에는 뭘 하는지, 술은 잘 마시는 편인지, 혹 운동도 하는지. 여전히 낯선 이의 안부를 물으며 승아는 잔에 담긴 커피의 양을 눈치껏 조절했다. 빨리 마시다가도 마시지 않으면서 마시는 척을 했다. 2시간. 예의상 지켜야 할 소개팅의 지속 시간에 대해 고민하면서 승아는 매대에 진열된 와인 병을 만지작거렸다. 상온에 보관되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병은 아주 미지근했다. 이대로 코르크만 따고 마시면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뜨뜻미지근하게 흐를 테지. 상념에 빠진 승아에게 점원이 다가와 친절하게 인사했다. "찾으시는 와인 있으세요?" 승아는 난처한 척 눈썹을 늘어뜨리는 시늉을 하며 추천해달라 요청했다.
"요즘은 내추럴 와인도 많이 드세요. 유기농 와인이기도 하고 인위적으로 탄산을 주입하지 않거든요."
점원은 내추럴 와인이 숙취도 없다고 덧붙였다. 내추럴 와인의 탄산은 자연 발생한 탄산이라고. 심심하고 평온한 탄산감. 평온한 연애라는 건 안전한 연애의 다른 말이다. 안전한 연애엔 얼마나 많은 계산이 들어갔을까. 영미 씨의 말대로 흉흉한 세상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발행되는 수십 개의 뉴스를 보며 승아도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자신의 안녕은 자신이 챙겨야 하는, 그러지 않으면 위험한 (연애) 세계. 그런데 서로의 신변이 확보된 소개팅 자리에서도 서로의 안녕을 챙겨야 해? 승아는 또 한 번 화가 솟구쳤다. 그러는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34살에게는 숙취 없는 연애만이 적합할까. 승아는 점원이 추천한 5만 원 대의 내추럴 와인 한 병을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투명한 핑크빛의 로제 와인이었다. 적절히 달달하고 적절히 탄산감 있는 와인이 자신에게 잘 어울린다고 승아는 스스로 평가했다. 꽤 묵직한 무게의 와인 병을 계산대에 올려놓자 쿵 하는 소리가 점원의 주의를 끌었다. 자신이 추천한 와인을 구매하는 승아를 본 점원은 적절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와인 세계를 나서는 승아의 등을 향해 밝게 인사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