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은 집과 살 수 있는 집 사이에서, 내가 머물고 싶은 마음의 자리
가끔 남편은 묻는다.
“당신도 전원주택에서 살아보고 싶어?”
나도 한 번쯤 생각해본 적이 있다.
‘전원주택에서 살면 아파트보다 삶의 만족도가 높을까?’
“남편이 건축사인데, 집 하나 지어달라고 해요~”
주변에서 종종 듣는 말이다.
하지만 집이란 게 그렇게 쉽게 지어지는 게 아니다.
땅을 사고, 설계를 하고, 인허가를 받고, 시공사를 정한 뒤
문고리 하나까지 신경 쓰며 지켜봐야 비로소 완성된다.
준공을 마치고, 인테리어를 꾸미고,
가족의 취향에 맞게 공간을 완성하기까지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게다가 요즘은 모든 게 비싸다.
땅값, 자재비, 인건비—모두 몇 배씩 올랐다.
대출도 쉽지 않아, 결국 자기자본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 남편의 질문,
“당신도 전원주택에서 살아보고 싶어?”는
사실상 틀린 질문이다.
살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있는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미 지어진 집을 전세나 월세로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운 좋게 매물을 만나더라도,
그 집은 다른 이의 기호에 맞춰 지어진 공간일 것이다.
우리 가족에게 딱 맞게 바꾸려면 비용이 들고,
집주인의 허락도 필요하다.
결국 마음껏 꾸릴 수 없는 집이라면,
그건 내 집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래서 생각해보았다.
나는 정말 전원주택에 살고 싶은 걸까?
아니, 나는 남편이 설계한 집에 살고 싶은 것이었다.
가족의 취향이 하나하나 녹아 있는 집—
남편에겐 음악실과 작업실,
큰아이에겐 피트니스룸과 드레스룸,
작은아이에겐 공부방과 컴퓨터실,
그리고 나에게는 조용한 작업실과 작은 베이킹룸이 있는 집.
아파트의 편리함과
전원주택의 여유로움이 어우러진 공간,
창밖으로 사시사철 꽃이 피고,
작은 마당엔 유실수가 자라는 집.
그런 집에서
가족이 저마다의 취향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게, 지금 내가 꿈꾸는 집이다.
덧.
나이 오십이 되니 ‘집’이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공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젊을 땐 그저 크고 예쁜 집이 좋았지만,
이제는 ‘어떤 마음으로 사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남편은 가끔 묻는다. “당신도 전원주택에서 살아보고 싶어?”
하지만 전원주택이든 아파트든, 그 안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가
그 집의 온도를 결정한다는 걸 조금은 알 것 같다.
살고 싶은 집과 살 수 있는 집 사이,
그 좁은 틈에서 나는 여전히 나만의 집을 꿈꾼다.
사시사철 꽃이 피는 마당, 가족의 기호가 깃든 방들,
그리고 내 마음이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
이 글은 그 ‘집’에 관한, 쉰의 문턱에서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