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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마추어 Feb 24. 2023

내가 바로 물경력이더라

나의 20대, 지금 생각해 보니 참 꽃 같던 나이였다. 그때의 나는 자신감 넘치던 사회초년생이었다. 직장에 대한 아쉬움도 없고, 취업 성공률도 꽤 좋았다. 그러다 보니 사회 초년생 때는 이직이 잦았다. 20대 후반쯤 되자, 나이에 비해 이력서 경력칸이 많이 채워지는 게 끈기 없어 보일까 싶어 한 직장에서 꼭 2년 이상 버티자는 각오를 다졌었다.


다부진 각오로 만난 이곳이 내가 10년째 몸 담고 있는 문제의 직장이다. 여기서 나는 커리어가 급성장할 수 있는 30대를 통으로 날렸다. 그리고 나는 소위 말하는 물경력이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아니다 싶으면 도망갔어야 하는데 생각이 짧았다. 안정적이고 성과 강요 없는 회사, 육아에 우호적인 분위기. 꽤 괜찮아보였다(2년마다 회사 주인이 바뀐다는 점을 간과한 채). 업무적인 메리트가 없었음에도 그 달콤함에 취해 현실에 안주했다. 쓸만한 경력직일 때 끊임없이 도전해서 내 커리어를 성장시켰어야 했는데...엉덩이 무겁게 버틴 결과, 난 커리어 투자에 완전히 실패했다. 경력직도 잘 나가는 시기란게 있는데 말이다. 내 지속가능한 커리어를 위해선 30대가 정말 중요했다. 적기를 놓치니 취업시장에서의 내 가치는 곤두박질 쳐버렸다.


혹시라도 사회초년생 혹은 주가 높은 30대 직장인이라면 겉보기에 안정적인 이미지의 회사에 속지 않기를 바란다. 나무가 아닌 숲을 봐야한다. 공사나 정부 공공기관이 아니고서야 물경력 되기 십상이다. 중요한 건 소속이 아닌 직무다. 이런 류의 회사는 젊은 시절 체득한 직무 노하우를 중장년쯤 돼서 풀러가야 대접 받는 듯 하다.


이곳에서 난 10년간 미친듯이 일했지만 커리어상으로는 남는게 없다. 그저 회사의 맞춤형 노예로 거듭났을 뿐이다. 온갖 행정(잡무)과 해당 직무에서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지만 요즘 사회는 전문성 있는 인재를 원한다.  


이 회사에서 개인의 성장도 생각해 볼수 있지만.. 일복 많은 사람과 승진하는 사람은 꽤 달랐다. 여기서 나는 아이를 낳았고, 육아휴직을 썼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었고, 신규 직원들은 많아졌다. 근속년수를 빌미로 회사는 내게 수많은 업무와 책임감을 등에 지우지만, 정작 인사는 품안의 자식만 챙기더라.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비영리기업의 학연, 지연 인사는 대단했다. 쓸데없는 책임감에 10년을 일하고 뒤돌아보니 남는건 혀끝의 씁쓸함이었다. 매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하지 않으련다. 다만, 여기서의 내 쓰임은 다했다.


이제 취업시장에서의 내 한계가 느껴진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내 나이테도 그새 많이 늘었다. 이제 다른 회사에서 그냥 일꾼으로 들어가기엔 부담되는 나이가 됐다. 리더급으로 가야하는데 이직의 폭은 좁다. 특히 전체적인 업무 시스템이 다른 일반 사기업은 허들이 높고, 비슷한 분위기의 회사는 보직자 티오가 잘 나지도 않는다. 위로 올라갈수록 수요 대비 자리 공급은 적다.


만약 내가 이 회사에 남는다면, 나보다 어린 리더는 더 늘어날 것이고 유통기한이 다한 고참 직원들은 언제나 그랬듯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물경력(난 물먹은 경력이라 말한다). 직원의 경력에 물을 먹인 회사는 언제든 직원을 물먹일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이 업계에서 엉덩이 무겁게 버티기 보다 새로운 도약을 계획 중이다. 취업시장에서는 매력없는 이력과 행보일지라도 모든 경험은 피가 되고 살이되어 내 삶에 보탬이 되기 마련. 지난 10년간 회사에 나를 갈아넣었다면 앞으로는 내 인생을 위해 내 모든 열정을 쏟아보려 한다.


지금의 내가 10년 전 나를 만나서 조언을 해줬다면 어땠을까. 선택이 달라졌을까? 아닐 수도 있지만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


 "네 업무가 고민이 된다면 버티는게 능사가 아니야. 넌 너의 역량을 키워줄 수 있는 직무를 찾아야해. 자신과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그 회사에서 네 업무의 성장 가능성이 적다면 결단력 있게 그만 두는 용기도 필요해. 앞으로 10년 뒤 너의 위치는 네 결정에 따라 달라질거야. 너는 생각보다 젊고, 기회는 많이 있어. 회사 사람들이 우물안의 개구리란 생각이 든다면 너도 곧 그 개구리 중 한마리가 되는거야. 좁은 시야에 갇히지 말고 넓게 봐. 그 시간이 너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를"


나의 진심이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누군가의 가슴에 닿기를. 그리고 그 사람이 더 나은 선택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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