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는 별도의 사람이 아니다, 나도 그럴 수 있다
외부의 인정신호만 갈망하는 존재 그리고 외부의 시선에 매달리 관계에 대하여
인간의 존재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우리는 모두 욕구와 감정,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느끼고 표현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같은 상황에 놓여 있어도 원하는 방향은 다를 수 있고, 같은 대상을 바라보아도 해석은 달라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독립적 존재이며, 동시에 고유하고 유일하기에 소중하다.
인식의 차이가 만드는 갈등
사람마다 무엇을 먼저 인식하는지가 다르다. 어떤 이는 정체성 인식을 우선시하고, 또 다른 이는 욕구 인식, 감정 인식, 마음 인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 차이는 대화의 충돌과 오해를 낳는다.
특히 정체성 인식에 집착하는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을 보일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신의 행동과 역할이 평가받는 방식에 종속되어 있으며, 부정적 평가를 곧 거부로 받아들인다. 이는 곧 열등한 자기로 이어지고, 잘못된 자기 수용의 방향을 강화한다.
나르시시스트적 관계의 반복
예를 들어, 한 엄마가 가족을 위해 절약을 실천하며 짜장면 하나도 먹지 않는다고 하자. 그녀는 이를 가족을 위한 당위성으로 믿고, 모든 가족이 자신처럼 절약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 자신의 결핍된 욕구를 인식하지 못한 채 희생을 당연시하는 태도다.
가족이 절약을 따르지 않으면 비난이 돌아간다. “넌 누굴 닮아서 이러니, 이러다 거지된다”라는 말은 비교와 평가를 통해 자신의 희생을 정당화하려는 방식이다. 이는 단순히 엄마의 선택이 아니라, 과거 부모에게서 욕구와 감정 돌봄을 충분히 받지 못한 관계에서 필요한 존중 이해 배려의 결핍의 되물림이다.
필요한 전환: 욕구와 마음의 인식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을 가진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정체성 인정이나 우월감이 아니다.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존중, 배려, 기다림, 거절의 수용 능력이다.
먼저 내 욕구가 무엇인지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도 욕구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다음으로 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상대의 감정에도 이름이 있고,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도 마음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전환 능력은 관계 속에서 훈련되어야 한다. 욕구·감정·마음을 인식하고 이름 붙이는 과정은 서로 다른 존재가 차이를 존중하며 신뢰를 쌓는 기반이 된다.
갈등 해결의 길
갈등은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욕구와 마음의 인식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해결의 길이다. 한쪽만 희생하면 끝없는 지침으로 이어지고, 결국 관계는 무너진다. 함께 사랑하는 사이라면 서로의 욕구와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의할 점은 상대 욕구와 감정이 ~~ 일 것이다라고 추측하거나 단정 짓는 습관은 멈춰고 그 대신 직접 묻고 그 대답을 기다려주는 인내가 필요하다..
상대도 평소에 자기인식 자기 이해가 어려운 사람이라면, 욕구 마음에 이름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건 서로 묻고 관심을 갖는 태도면 충분하다. 이제 서로의 존중의 다리가 연결되고 이 시작의 결과는 얼마나 많이 자주 실천하는지에 대한 하루 양에 달려있다.
여기서 상대 욕구와 감정을 공감하고 들어주는 것과는 다르다. 상대와 내가 다름의 그 차이를 구분하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고 , 그 목적은 자기 가치감 즉 나다움에 대한 감각을 형성하고 느끼기 위함이다.
나르시시스트 성향을 극복하는 엄마의 사례
관계의 전환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경험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어느 날 친척들이 집에 놀러 왔다.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아이에게 빨래를 개도록 부탁했다. 아이는 응했지만 속도가 느려 답답해진 엄마는 물었다. “왜 하기 싫으니?” 사실 아이는 다른 조카들이 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만 빨래를 접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나 있었다.
그때 엄마는 평소와 달리 새로운 태도를 보였다.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아이는 조심스럽게 “네”라고 대답했다. 이 순간은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엄마의 기대와 감정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존중하는 독립적 자아의 탄생이었다. 아이는 거절을 말하는 용기를 경험했고, ‘괜찮구나’라는 감각을 처음으로 체험했다.
평소 같으면 엄마는 “네가 한다고 했으니 책임져야지”라며 역할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이의 욕구를 존중했다. 아이가 엄마의 부탁을 거절했을 때, 엄마는 이를 ‘존재 거부’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순히 ‘욕구의 차이’로 인식했다. 이는 아이에게 자기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제공한 경험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역할과 책임보다 욕구와 감정을 존중하는 태도를 실천했다. 아이는 거절을 통해 독립된 자아를 찾는 순간을 경험했다. 이 작은 사건은 단순한 가사 분담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차이를 인정하며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출발점이었다.
욕구 감정억제에서 다시 찾은 해방의 길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은 외부의 인정의 신호만을 기다리며 강화된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은 자기 욕구·감정·마음을 인정하는 순간 시작된다.
엄마는 아이의 거절을 수용하며, 존재 거부가 아닌 욕구의 차이로 받아들였다.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존중받으며 독립된 자아를 경험했다.
이 경험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결국 나르시시스트는 별도의 사람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욕구와 마음을 돌보지 않고, 원하는 것의 뿌리를 찾지 못하면 관계 안에서 존중·배려·기다림·거부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게 된다. 이유도 모른 채 상대의 평가에 종속되고 집착하며, 결핍을 인정하지 못한 채 반복되는 갈등 속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자기 욕구와 감정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에서 벗어나 진정한 관계와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성향의 변화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차이를 존중하며 신뢰를 쌓아가는 관계의 새로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