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작가의 <파과>를 읽은 사람을 찾습니다.
가끔 그런 책이 있지 않나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당장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을 찾고 싶게 만드는 책이요. 당신을 붙잡았던 문장은 뭐였는지, 이 인물은 당신에게 어떻게 남았는지, 혹시 당신도 눈물을 흘렸는지, 나와 같았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은 충동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가 있어요.
구병모 작가의 <파과>를 읽었을 때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더라구요. 이야기의 결말에는 도달했지만, 결코 끝내고 싶지 않은 기분. 주인공 '조각'의 삶은 계속 이어질텐데 나만 혼자 과거에 남겨지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그녀를 아는 다른 사람을 정말 만나고 싶었답니다. (혹시 여기에 계실까요?)
그런데 얼마 전 퇴근길 지하철에서 <파과>를 손에 든 사람을 만났어요. 붐비는 7호선 열차 안에서 마지막 열 페이지 가량을 앞두고 계셨는데, 내려야 할 지하철역이 가까워질수록 입술이 바짝 마르더라구요. 미쳤다 생각하고 딱 한 번만 책 어떠냐고 물어볼까? 저 분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만 지하철을 더 타고 가볼까? 그 분은 모르셨겠지만, 저는 혼자 온갖 고민을 하다 얌전히 하차했는데 아직까지도 말을 걸어보지 못한 걸 조금 후회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결정했습니다!
언젠가 또 다른 <파과>의 독자를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제 이야기를 기록해놓을 거예요!
여기서 잠깐 <파과>를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한 홍보가 있겠습니다.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찬사"
40여 년간 날카롭고 냉혹하게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살아오던 60대 여성 킬러 '조각'. 몸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게 삐걱거리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노화와 쇠잔의 과정을 겪으며 조각은 새삼스레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게 된다. 소멸의 한 지점을 향해 부지런히 허물어지는 모든 것.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연민을 느끼며, 조각의 마음속에 어느새 지키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60대, 여성, 킬러. 그리고 소멸과 상실 끝에 빛나는 순간.
이 단어들이 만나는 지점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책의 제목 '파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첫 번째는 부서진 과일 또는 흠집 난 과실, 다른 하나는 여자 나이 16세 이팔청춘, 즉 가장 빛나는 시절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깨지고 상하는 '파과'임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가장 빛나는 '파과'의 순간이 찾아올 수 있을 거예요. 마치 조각처럼.
사실 <파과>는 제가 읽은 구병모 작가의 첫 책입니다. (파과 이후로 미친듯이 구병모 작가의 다른 책들을 장편, 단편 가리지 않고 모두 사모았다는 건 우리만의 비밀...) 아시는 분들은 모두 아시겠지만, 구병모 작가는 특유의 만연체와 함께 엄청난 단어들을 구사합니다. 때로는 국어사전과 함께 읽어야 할 정도로 생소하고 이질적인 단어들로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해요.
하지만 그 어떤 문장보다 깊숙한 감정과 비일상적으로 매달려 있는 표현들에 한 번 빠져든다면,
결코 쉽게 헤어나올 수 없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함께해요! 아주 안락합니다...ㅎㅎ
이제 이 밑으로는 엄청난 스포일러(주의)와 극도로 주관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상관없으신 분은 조금 더 스크롤을 내려주시고, 아니라면... 꼭 <파과>를 읽고 이 곳으로 다시 돌아와주세요!
읽은 지 꽤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직도 질척거리며 붙잡고 있는 인물은 바로 투우입니다. 스페인의 투우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 누구보다 거칠고 공격적이며 난공불락의 단단한 성으로 자라났지만 결국 조각의 무릎 위에서 어릴 적 가루약을 받아먹던 순간으로 돌아갔던 투우. 처음에는 투우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 몇 번을 뒤적거리며 반복해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맺어진 결말대로 투우를 보내줄 수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구병모 작가의 다른 소설집 <그것이 나만이 아니기를>의 해설에 <파과>를 인용한 부분이 나옵니다.
여성 청부살인업자가 어머니를 대리해서 내복약을 조제할 때, 기술적 치밀성으로 우아하기까지 한 그녀의 동작은 그 약을 받아먹을 어린 인물을 유혹하고, 그의 기억에 칼금처럼 예리하게 각인되며, 그리하여 나이 든 여성을 향한 구순기적 애착, 목숨의 수동적 위탁, 신체 절단면 취향 등이 혼용된그의 파괴적 사랑의 성향과 이후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부모와 애정에 대한 극도의 결핍으로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었던 투우는 우리가 읽지 못한 시간 속에서 어떤 잿빛으로 뒤덮여 조각을 찾아 헤맸던 걸까요? 조각이 중얼거린 '네가 바로 그 애구나.'라는 혼잣말 같은 말에 감기던 눈동자를 열어 조각을 바라본 투우의 눈에 얼마나 깊은 기대와 감정이 묻어있었을지 상상할 때면 항상 숨이 차오르곤 합니다.
'그녀의 태도에서 그녀가 결국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며, 자신의 존재가 그녀 곁을 스쳐지나갔을 수많은 남겨진 어린아이들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직감하지만 실망을 드러내지 않은' 투우는 결국 그녀의 무릎 위에서 삶을 내려놓습니다. 그 많은 어린아이들 중에서도 흔치 않게 그녀 옆에서 삶을 내려놓는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면서요.
조각이 알약을 삼키지 못하던 시절의 투우를 중얼거린 순간을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은 항상 절 한없이 먹먹하게 만들어요. 그녀의 옆에서 눈을 감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투우를 짤짤 흔들어 깨워 알려주고 싶을 정도로... (감동파괴) 차마 행복하라고 말해줄 수도 없는 투우에게, 언젠가는 닿을 수 있겠죠?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낼 조각과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기다릴 당신에게 이 글을 선물할게요:)
그저 한 명의 파과덕후가 주절주절 써내려간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이 생기면 꼭 같은 작가의 모든 책을 쓸어담는 버릇이 있어요.
그렇게 만났던 구병모 작가의 <아가미>, <버드 스트라이크>,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회독을 해버렸다는 후일담...
ps 2. 그래서 도대체 파과 영화화 언제 하는지 아시는 분 ㅜ
★파과 영화화 기원 1일차★
투우는 꼭 김성철 배우님으로 부탁드립니다... 제발요...
파과덕후 큐레이터가 있는 비블리가 궁금하신가요?
냉큼 영업당해 지금 당장 <파과>를 읽고 싶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