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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m Aug 12. 2021

얼굴도 모르는 그대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네요.

오늘의 순간 #1



아침부터 개론 수업을 들어서 그런가 정신이 없다. 잔뜩 꾸겨저 왼손에 들린 종이컵은 아침부터의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3년째 다니는 대학이지만 도저히 1교시는 적응이 안된다. 1교시는 나태한 대학생들을 고문하기 위한 제도가 분명하다. 남은 1년 동안 1교시를 계속 듣는다면 졸업은 고사하고 살아남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도 죽더라도 먹고 죽어야겠다. 집 가서 밥 좀 먹고 에어컨 밑에서 좀 쉬다 오면 살아나지 않겠어?라는 착각을 하며 계단을 오르는데, 웬 갈색빛 상자가 문 앞에 떡하니 누워있다.


이게 뭐지.

갑자기 머릿속에 지옥 같았던 수업 시간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위이이잉...'


'010-xxxx-oooo'


'고객님의 집앞에...'



확실히 기억나는 이 전화번호와 문자. 나와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분명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사람.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남자라 생각되지만서도 내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사람. 이 전화번호는 E택배사 김민호 기사님의 것이었다. 햄버거와 에어컨이 차지하던 내 머릿속은 며칠 전 계산기를 두들기던 10일 전으로 돌아간다.


하얀 인터넷 사이트 바탕에는 회색빛의 가방이 하나 떠 있다. 고작 가방 하나 직구하는 것인데 환율에 할인 가격까지, 내 머릿속은 각종 계산과 숫자로 가득 차 있다. 그냥 백화점 가서 살까 하다가도 이렇게 차이나는 가격을 무시할 수는 없다. 계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지만 안사면 후회할 것이 확실하다. 어떡하지...


그렇게나 날 괴롭히던 녀석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었다. 왼발로 상자의 모서리를 밟아 녀석을 일으킨다. 오른손은 재빠르게 도어락을 뚫어내고 힘차게 문고리를 제친다. 지난달에 산 신발이지만 곧장 벗어던지고 서랍 속에 커터칼을 꺼내온다. 날카로운 녀석을 오른손에 쥔 채 ‘개봉 시 칼 사용금지’라는 문구는 왼손으로 가린다. 경고문을 가리는 이유는 양심에 조금 찔리기 때문이다. 사실 누구나 알듯이, 날카로운 칼질만이 이 단단한 포장을 뚫어낼 수 있다. 혼자서 손으로 찢다가는 화만 나고 진만 더 빠진다.


칼질은 빠르고, 신중하게 해야 한다. 3cm 길이의 칼날을 노란 테이프에 깊게 찔러 넣는다. 적당한 깊이감을 느끼고 슥... 한 번의 칼질로 상자를 입막음하던 녀석을 완전히 찢어낸다. 나를 반기는 가방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른이 되어가는 소년처럼 생기 있는 푸른빛을 가진 회색빛이다. 오 방금 이 표현 너무나도 좋았다. 오늘 리뷰할 때 꼭 써야겠다.


근데... 다음 수업 시간 언제더라? 아직 나 밥도 못먹었는데...




-택배 받는 순간, 끝-


*본 이야기는 허구이며, 작가의 창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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