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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ism Aug 13. 2021

검붉은 계단 끝에서

오늘의 순간#2



계속해서 내려가도 끝이 없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곤 검붉은 색 벽돌의 계단뿐이다.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 길일까. 살아나갈 수는 있을까. 오른손에 들린 램프 하나에 내 목숨이 달려있다니, 이건 너무나도 억울하다. 이 계단을 끊임없이 내려온 것도 벌써 6시간 째다. 아니 6시간이 맞나? 나는 여기가 어디인지, 아니 왜 이곳에 있는지 조차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램프와 이 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을 떠올려 보자. 분명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에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내가 납치라도 되었다는 것인가? 어이가 없다. 내가 그렇게 둔하다고? 하지만 그거 말고는 이 일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굴까. 도대체 왜 나를 납치한 걸까. 돈 때문에? 그런 놈이 이런 곳에 가둔다고? 아니면 <올드보이>처럼 복수인가? 나는 정말 맹세하건대, 누구한테 미움을 살 일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따지고 보면 나는 늘 피해자였다.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끼는 건 언제나 나였으니까.


첫 사건은 고등학생 때였다. 혼자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나는, 중학교 친구들과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아는 얼굴 없이 매일매일 혼자서 밥을 먹었다. 그래도 처음엔 버틸만했다. 우리에겐 스마트폰이 있었으니까. 낮에는 각자 공부하고 저녁에는 같이 게임하면 그걸로 됐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게임엔 나 혼자였다. 왜 안 들어오냐 연락해봐도 달라질 건 없었다. 연락이 뜸해졌던 이유? 나도 모른다. 이유라도 설명해줬으면 얘기라도 나눠봤겠지. 그냥 나는 그 정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냥 학교가 달라서였기 때문이라고는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건 너무 비참하잖아.


두 번째는 군대였다. 뭐 사실 이건 누구나 겪을 법한 이별이었다. 인터넷에도 자주 보이는 클리셰 덩어리의 스토리였으니까. 여느 커플처럼 처음엔 사랑을 속삭이고 휴가 나가서 만나고, 그러다 오해가 생겨 헤어지고. 근데 최소한 나는 아닐 줄 알았지. 아니 최소한 나는 다를 줄 알았다. 조금이라도 설득할 수 있을 줄 알았고, 내가 그녀를 생각하는 만큼 그녀도 나를 생각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린 다른 사람이었고, 그걸 뛰어넘을 만큼 사랑하지 않았다. 이별에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한가. 이런 거 머리로는 정말 잘 알고 있었다. 혹시나 만약에 헤어지더라도 안 슬퍼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렇게 간단하게 끝이나다니. 내가 생각한 최후는 그게 아니었다. 최소한 전화기 붙잡고 몇 시간이라도 떠들어야 하는 거 아냐? 정말 타오르지도 못하고 꺼진 불꽃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쉽게 마음을 주고 누구나 쉽게 믿었었던 나의 잘못일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최선을 다했고 그 사람들을 내 1순위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을 줬다. 나의 마음을 줄수록 상대방도 행복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나는 다른 건 안 바랐는데, 나는 그저 준 만큼의 마음만 받고 싶었는데... 그래 이게 욕심이면 욕심이다.


근데 어떡하나. 안 그러려 해도 자연스레 정이 생기는데. 내가 남에게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내 마음인데. 소중한 사람한테 소중한 것을 주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나한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을 안 주면 도대체 무엇을 줘야 하는 것일까. 왜 맨날 나는 이러지? 왜 여기서도 혼자서 이러고 있어야 하지? 나도 혼자 있기 싫다고, 나도 외로운 거 싫다고. 내가 바란 건 그냥 진실된 마음뿐이었다고...


그때, 갑자기 계단이 끝난다. 너무 놀라 커진 두 눈을 길을 따라 움직여 본다.

길의 끝에는 햇살이 드는 문이 하나 있고 웬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가 서 있다.


"너 뭐야?"


"..."


"여기 뭐하는 데냐고"


"..."



또 말이 없다. 억울함 때문인지 나는 내 분을 참지 못한다. 공포보단 분노가 나를 지배한다.



"뭐라도 말 좀 해봐 이 새끼야, 내가 너한테 뭔 잘못을 했냐?"


"..."


"뭐라도 좀 말 좀 해보라고 이 새끼야!!! 왜 맨날 나한테만 이러냐고. 난 시발 착하게 살라 그래서, 사람들한테 잘하라 그래서, 항상 사람한테 진심으로 대하라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산 것 밖에 없었다고. 왜 내가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데. 왜 내가 이딴 곳에 갇혀서 혼자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데. 왜 씨발! 나만 외롭고 힘들어야 하냐고..."


말이 없던 소년이 내게 걸어온다. 난 주먹을 쥔다. 이젠 정말 무서울 것이 없다. 죽거나 죽이거나다.


먼저 주먹을 날리는 순간 녀석의 몸통이 뚫린다.


뭐지...


혼란스러운 그때, 소년이 나를 껴안는다.


"왜 맨날 혼자라 생각해, 너한텐 내가 있잖아.

외로울 때마다 나를 찾아와. 이렇게 안아줄게.

난 항상 너의 마음속에 있어. 난 네가 나를 믿어주는 만큼 커진다고.



'나'는 '너'니까..."





"삐비-빅"


갑작스러운 전자음에 눈이 뜨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 방이다.

시계는 오전 8시 15분을 가리키고 있고, 창문 사이로는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다.




-외로움과 마주한 순간, 끝-


*본 이야기는 허구이며, 작가의 창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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