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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Jan 07. 2021

혹한 속 다람쥐

5년 따리 일러스트레이터의 후회와 반성

내가 스스로 그림이란 매서운 혹한에 뛰어든 나이는 고작 스물여섯이었다.


나는 평범한 인문계 문과를 졸업하여 나름대로 괜찮은 대학엘 들어갔고, 스물다섯엔 나름대로 큰 회사의 볼트와 너트로 쓰일 기회도 갖었다. 회사에선 입사를 축하한다며 꽃바구니를 보냈고 신이 난 어머니는 그 꽃바구니 사진을 야무지게도 찍으시고는 한동안 카톡 프사로 올려놓으셨다. 내가 다니지도 않고 회사를 때려치우자 프사는 곧 내려갔지만 말이다. 


신입사원 연수를 앞둔 어느 날, 나라에는 메르스라는 이름도 낯선 전염병이 터졌고 신입 연수도 별안간 미뤄지게 되었다. 사람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면 괜스레 엉뚱한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인지 입사를 정말 속눈썹 앞에 두고 나는 스스로에게 흠뻑 빠져서는 고민 끝에 회사를 가지 않기로 (내 멋대로) 결정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뭐 여차저차 고군분투하며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는데 초반에는 '오? 이런 식이라면 꽤 괜찮겠는데...?'라고 생각했는데 한 3년 차가 되니 '오? 이런 식이라면 금방 거지되겠는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초심자의 행운이었던가 초반에는 운 좋게도 초짜지만 재미난 작업을 더러 맡았고 이름도 슬슬 알려가고 있었는데 3년 차가 되었을 무렵 까닭도 모른 채 팍 고꾸라지고 말았다. 


사실 그림 작가 2년 차에 개인 에세이집도 내고 이런저런 책에도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이를 증명하듯 손목은 언제나 삐그덕 거리고 부어있었으니 이대로라면 자리 잡는 것엔 문제없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혹독한 이 업계에서 그런 순순히 풀리는 이야기란 유니콘 같은 것. 나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아니 슬럼프 이전에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그게 슬럼프를 만들었다. 


그 아득하고 지난한 터널 속에서 나는 가장 작은 부피로 웅크리기 바빴다. '내 그림이 이젠 후진가?', '벌써 후지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림은 변한 게 없는걸...', '아 변하지 않아서 후진 건가?!' 아무튼 왜 이제는 내 그림을 찾지 않는 것인지 알아낼 수 없는데도 그 생각에 집착하고 골몰했다. 물론 답은 내가 알 도리가 없었고 다만 맥주를 왕창 마시고 소변 대신 눈물로 맥주를 내보낸 기억만이 가득하다.


아무튼간에 그렇게 음습하고 질척이는 시간을 얼마간 보낸 후, 운때가 맞았는지 다시 책에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1인분은 해결하고 사는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언제 끝날 지 모른다) 다행이다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이게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 매서운 그림 업계에 종사하는 동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다들 나처럼 생각하고 살고 있을까? 아니면 번뜩이는 다른 대안이 있는 걸까?


그래서 오늘은 눈곱도 떼지 않은 부은 얼굴을 하고 일어나자마자 바로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유튜브를 구경하였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베개에 얼굴을 다시 파묻고 '진짜 게으른 놈이네 나새끼..' 하면서 (여전히 부은 얼굴로) 자책했다. 나는 그간에는 '그려주시겠어요?' 하면 '넹!!' 하는 일을 주로 하는 수동적이디 수동적인 인간이었는데 유튜브에서 본 작가님들은 모두 스스로 개척하고, 스스로를 알리고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니까 나는 그간 누가 먹이를 던져주지 않으면 쌩배를 굶는 그런 이상한 녀석이었다. 


작디작은 다람쥐는 혹한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리미리 견과류를 동분서주 모으고, 그것도 부족하면 염치 불구하고 주변 인가로 내려와 똑똑~ 하고 먹이를 얻어온다. 양 볼테기가 터져라 모은다. 그것이 그들이 그렇게 작은 몸으로도 험한 숲에서 살아남는 비결이다. 나를 굳이 다람쥐에 비교한다면, 나는 그니까 혹한을 대비하여 땅콩을 모으기는커녕, 배를 곯고, 이웃집에 동냥하러 갈 용기도 없고 그저 눈밭을 걷다 보이는 빨간 열매나 하나 줏으면 그 한 입 거리를 스무 입으로 나눠서 먹는 그런 게으르고 아사하기 딱 좋은 다람쥐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반성의 의미로다가 다람쥐를 그렸다.

그린 이유를 이렇게나 장황하게 적는다.

작년에 내가 책임질 식솔이 하나 생겼기 때문에 

올해는 진짜 더 성실하게 땅콩과 해바라기씨를 

모으겠노라 다짐하며 그린 것이다.


올해는 정말 이웃집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이 나무 저 나무 훑으며

먹이를 많이 모을 것이다. 양 볼테기가 가득 찰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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