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려줄 게 많이 없는 엄마의 필사기

by 코니

“됐어, 그건 나중에 나 혼자 다시 볼 테니깐 그냥 넘어가”

짜증 섞인 뭔가 답답하다는 듯한 딸애의 목소리다. 가급적 시험기간엔 지들 비위 다 맞춰주는 편이지만 이번엔 나도 더는 참지 못하고 한소리 한다.

“그럼 도대체 나랑은 왜 같이 공부하는데? 네가 글을 못 읽어서 내가 읽어 주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다 그냥 외우는 거니깐 이번부터 너 혼자 한번 해볼래?”

한 번씩 나를 무시하는 듯한 딸애의 말투에 나도 그동안 쌓인 불만이 터져 나왔다. 순간 딸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엄마가 화났음을 인지했고, 게다가 혼자 시험공부하라는 말에 어떻게 할지 몰라 적잖이 당황한 듯하다. 잠시 후 볼멘 목소리로 딸애가 대답한다.

“그럼 이번 과학시험은 그냥 외우면 되는 거니깐 나 혼자 할게. 근데 다른 과목은 같이 하면 좋겠는데.”





나는 우리 애들을 모두 학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함께 공부해왔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저학년 때는 내가 직접 다 가르쳤고 고등학교 선행을 시작하면서부턴 같이 인강을 들으며 공부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녔다. 애 둘이나 맡길 곳이 없어 둘째를 낳고 전업주부가 되고 나니 시간이 갑자기 많아졌다. 게다가 솔직히 학원이란 곳도 믿지 못하겠고 소싯적 나도 수학이라면 한가닥 했기에 내가 직접 공부를 봐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학원비가 들어가지 않으니 살림에도 어느 정도 보탬이 될 것 같았고….




큰 애와 작은 애는 5살 터울이라 나는 작은 애 공부 걱정 없이 큰애의 학습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큰 애는 놀기 좋아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다. 그런 놈을 붙잡아 공부시킨다고 게다가 고등학교에 가서야 뒤늦게 본격적인 사춘기가 찾아와 매사 나에게 삐딱하던 놈 비위 맞춘다고 큰 애 고등학교 3년 내내 얼마나 맘고생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2년 전 큰 애 고3 때는 오래간만에 나를 본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랄 정도로 얼굴이 팍 삭아버렸다. 다행히 큰 놈은 본인이 원했던 대학에 운 좋게 합격하여 지금 집을 떠나 자취 중이다.



오빠 때문에 힘들어하던 내 모습을 조용히 지켜 봐주던 딸애는 오빠 고등학교 졸업까지만 엄마가 신경 못 써줘도 이해해달라는 내 말을 어린 나이에도 믿고 기다려주었다.(지금 생각해도 딸애한테 너무 고맙다) 다행히 큰 애가 고3 때 딸애는 중1 자유 학년제 시기라 내가 신경을 덜 써도 큰 부담은 없었다. 그 후 딸애가 중2가 되면서부터는 힘들었던 큰 놈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드디어 끝나고 이제 딸애에게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이 인강 수업을 듣고 학습량도 점점 늘리며 몇 번의 중간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니 이젠 어느 정도 본인만의 공부 스타일도 찾은 듯하다. 큰 애와 달리 딸애는 밖에 돌아다니는 것보다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한다. 무엇보다 코로나 덕분에(?)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도 많이 없어 공부에 집중할 시간이 그만큼 늘어났다. 열심히 하는 만큼 결과도 좋은 편이다. 딸애는 초등학교 때도 시험이 없던 세대라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써 시험다운 시험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건지 몰라 나에게 많이 의지했었다. 엄마가 중요하다는 거, 시험에 나올 수 있겠다는 거, 이런 것들이 실제 시험에 적용이 많이 되었고 같이 교과서를 꼼꼼히 보고 나중에 다시 물어 봐주면 자기 딴엔 많은 도움이 되었던 거 같았다.




하지만... 내가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강사도 아닌데 어떻게 전 과목을 잘할 수 있으랴. 그분들도 역시 각자 전공과목이라는 게 있다. 국영수를 제외하고는 나도 교과서 보면서 딸애한테 물어가며 이해 안 되는 부분은 몇 번씩 다시 읽기 때문에 속도가 좀 느려질 때가 있다. 특히 과학에서. 근데 이놈의 기집애가 자기는 이미 수업시간에 선생님 설명 다 들었다고 교과서를 같이 보다 내가 조금만 버벅거리거나 이해 못 하면 그냥 넘어가자고 짜증을 낸다. 그럴 때면 자존심도 살짝 상하고 뒤늦은 학구열이 불타올라 꼭 이해하고 넘어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슬슬 나도 같이 공부하는 딸애 태도에 불만이 쌓여간다.




큰애 중학교 땐 이런 일이 없었다. 오히려 공부하다 무언가 의문점이 생기면 끝까지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학습하는 사람의 자세라 생각했다. 나는 당당했으며 큰애도 별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딸애는 달랐다. 공부에 대해선 지 오빠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자발적이다. 게다가 나의 두뇌는 1년이 아니 한 달이 다르게 둔해져 감을 팍팍 느낀다. 큰 애 때는 그 어려운 수능 수학도 애가 잘 모르면 1시간이 걸려서도 답지 안 보고 직접 풀어 가르쳐주었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이거 엄마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푼 문제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문제를 맞히고 안 맞추고를 떠나 어떤 한 문제에 대해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풀다 보면 너도 모르게 실력이 쌓이는 거라 가르쳤다. 큰애의 상위 1%의 수학 실력도 다 내 덕분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 옛날이여! 불과 몇 년 전이였지만 지금은 딸애 몰래 답지 풀이 보기 바쁘다.




나이 50이 넘어 딸애 하고 같이 미분 적분 공부하고 국어 비문학 지문 분석해 문제 풀고 영어 듣기 평가 연습이나 모의고사 문제 풀고 있음 내가 봐도 나 자신이 참 특이한 아줌마 같기도 하다. 다행히 큰애가 교대를 가준 덕분에 그간 이런 내 모습에 의구심을 품던 많은 사람들이(특히 우리 남편) 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젠 나에게 과외를 의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젠 머리도 잘 안 돌아가고 체력도 많이 떨어져서 정중히 거절하고 우리 딸애 하나에 집중한다. 솔직히 우리 딸애도 지금 내 수준에서 많이 버겁다. 내 기준에 애들 교육문제에 특히 게으르고 귀찮아하던 몇몇 지인들이 내게 던진 말 중 가장 귀에 거슬렸던 것은 차라리 네가 공부해서 서울대 가라는 소리였다. 정작 지들은 귀찮아서도 나처럼 하지 못하면서 나보고 애들 공부에 엄마가 그렇게 할 필요가 있냐는 말에 서운하기도 했고 맘 상하기도 했다. 물론 나도 나 같은 방식을 주위 사람에게 권하지 않는다. 그냥 학원 보내라고 얘기한다. 솔직히 보통의 나 같은 평범한 주부들이 해도 해도 끝없는 집안일 하면서 애들 돌보고 이렇게 공부까지 해야 하는 게 쉽지 않다. 무엇보다 중학교 과정은 어찌어찌 되는데 고등학교 과정은 어렵고 노력도 더 많이 해야 한다. 나도 그저 시작은 별생각 없이 했는데 일은 점점 더 켜져 버렸고 발을 뺄 시기를 놓쳐 버려 여기까지 온 것이다.




물려줄 게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자식에게 너희들 인생은 너희 것이니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너희가 알아서 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어떻게든 스스로 이 세상을 헤쳐나갈 길은 터주고 싶다. 예전에 한 예능 리얼 관찰 프로그램에서 판사 남편을 둔 모연예인이 우리 큰애와 동갑인 자기 아들에게 공부하지 말고 자기랑 놀려 다니자, 공부를 꼭 해야 하나, 안 하면 안 되냐 하며 투정 부리는 모습을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아이와 엄마가 바뀐 것 같았다. 주위 다른 친구들이 모두 고등학교에 대비해 학원 다니고 공부하기 시작하자 당시 중3이었던 그 집 아이도 걱정이 슬슬 되어 막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생전 안 하던 공부 하랴 엄청난 양의 학원 숙제하랴 애도 힘들고 매번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옆에서 챙겨주고 격려와 용기를 줘야 할 판국에 엄마라는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하는 거 보고 그 여배우에 대한 호감도가 뚝 떨어졌다. 쟤는 아빠가 판사라서 공부를 못해도 기댈 언덕이 있으니깐 엄마라는 사람이 저러는 가 싶었다. 우리 애들한테는 그런 언덕이 전혀 없는데... 2년 전 큰애 고3 때 수시 원서를 준비하면서 능력 없는 부모라 학생부 종합전형 서류가 몇 장 안돼 너무 아이한테 미안하고 가슴 아팠다. 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당시 정부 고위직에 있던 그 누군가가 장관에 임명되면서 그 자녀들이 대입 진학 과정에서 누린 특혜 때문에 전국이 시끄러운 때였다.






결국, 이번 기말고사 때는 과학만 혼자 공부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엄마랑 같이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딸애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이번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면 이과계열로 진로를 정한 딸애와 열심히 미적분을 공부하며 안 그래도 더운 여름을 더 뜨겁게 보내야 할 것 같다. 아마 이번 여름도 노화가 한참 진행되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 싸매고, 답답해하는 딸애의 눈치 보며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을 듯하다. 근데... 이렇게 안 돌아가는 머리 붙잡고 애쓰는데

'치매야! 너, 오기만 해 봐라'



매거진의 이전글너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