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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Oct 09. 2021

기자

직장인인데요, 기자입니다

기자 [명사]
신문, 잡지, 방송 따위에 실을 기사를 취재하여 쓰거나 편집하는 사람. (표준국어대사전)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많이 고민했다. 인터넷상에서 내 신상정보를 유추할 수 있을 만한 일말의 실마리라도 드러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여러 가지 SNS를 사용해 왔지만 대부분 가명을 쓰거나 계정을 비공개로 설정해 둔다. 다양한 신체 부위를 얼마나 창의적으로 훼손할 수 있는지, 상대방의 직업적 신념을 얼마나 처절하게 깔아뭉갤 수 있는지 등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이메일과 댓글 등을 비롯해 직접적인 비아냥과 욕설까지 수도 없이 마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동료 중에는 실제로 물리적 폭력에 노출된 경험이 있는 이들도 있다.


    물론 다종 다양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기사와 칼럼, SNS 게시물 등으로 대쪽 같은 소신과 빛나는 통찰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훌륭한 동료들이 많고,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다만 나는 좋아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오래 하고 싶었기에 지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거북이처럼 고개를 처박고 몇 년을 살았지만, 동료 기자들이 우울증을 호소한다는 기사가 조롱거리가 되는 지경은 좀 참기 힘들었다. 그게 꼭 일하다가 번아웃이 와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나에게 하는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잡음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못을 박자면, 조선일보 안 다닌다. 재직자들과 나 사이에 선을 긋자는 게 아니다. 어차피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미디어가 재생산하는 기자상은 크게 둘로 나뉜다.


1. 은밀한 거래를 하기 위해 요정이나 룸살롱에 앉아 천박하게 웃으면서 비싼 술을 마시는 기자.

2. 거대 권력으로부터 억압을 당하고 동료와 세상으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진실과 정의를 찾아 나서는 기자.


    세상에 정치부 기자와 사회부 기자밖에 없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여러 창작물을 보다 보면, 적어도 사람을 만나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어낸 티는 내지 않을 정도로만 부지런해졌으면 좋겠다는 심술궂은 생각이 고개를 내밀고는 한다. 동시에 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초대받지 않은 잔치에 굳이 와서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와 영화 따위를 멀리하게 됐다. 대체로 내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많은 일은 별로 티가 나지 않고 멋지지도 않아서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한다. 배경음악으로 저작물 사이트에서 돈 주고 다운로드한 예쁜 브이로그용 연주곡이 흐르지도 않고, 자못 비장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흐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월급이 다달이 꼬박꼬박 나오는 데 만족해서 배나 두드리고 있냐고 한다면 그렇지도 않다. 적어도 내가 아는 많은 젊은 기자들은 기사 리드도 읽지 않고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에게 이골이 났으면서도, 자신이 공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다는 '가오' 하나 뜯어먹고사는 사람들이다. 바른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내가 굴린 펜대에 사람이 다치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존엄을 지킬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런 어떤 종류의 공명심이나, 시쳇말로 '관종끼' 같은 것 하나 없이 자기 이름을 달고 불특정 다수에게 결과물이 들이대어지는 직업에 몇 년째 붙어 있는 게 아니다. 아니다 싶으면 아닌 것이다. '내 기사에 이딴 제목 붙이지 말라'고 편집부에 지랄을 하거나, 이 기사는 이렇게 나가면 안 된다고 꾸역꾸역 우기면서 데스크를 들이받거나 한다.


    그래서 동료들끼리 술자리에서나 앞뒤 없이 푸념하던 이야기들을 쓴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들은 내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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