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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Oct 10. 2021

곤조

기자는 곤조가 있어야 해?

곤조 [은어]
일본식 한자어 근성(根性·こんじょう)을 일본말로 발음한 것. 특수한 직업이나 일 때문에 생긴 날카로운 성질이나 성깔을 가리키는 비속어로도 널리 쓰인다. (최용기 국립국어연구원)


    "일할 때 '곤조를 부려'서 존재감을 과시해야 제 몫의 자리와 권리를 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개인"이라는 말이 웃기고 재미있어서 적어 놓았었는데, 한참 뒤에 출처를 찾으려 드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트위터였던 것 같다. 불행히도 저런 '곤조'를 지니고 있어야만 기자답다고 믿는 사람은 기자와 비(非) 기자 직군을 막론하고 너무나 많아서, 나처럼 심약한 사람은 좀 별나거나 유능하지 않게 보이는 모양이다.


    나는 누구에게 불필요하게 민폐를 끼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너무 싫다. 큰 소리가 나는 것도 싫고, 얼굴을 붉히는 것도 싫고, 싸우는 것은 더더욱 싫다. 남들도 나한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선량하다기보다는 심약한 것이라고 본다. 나를 만나거나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질을 대략 세 가지 정도로 평가하곤 한다.


1. 업무에 임하는 태도에 있어 적극성이 부족하다.

2. 사람한테 벽을 치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

3. 예의가 바르고 착하게 보여서 가까워지고 싶다.


    2번은 취재원과 동료들에게서 모두 들었다. 누구에게나 예의 바른 모습이 선을 긋는 것처럼 보인다나. 그래도 가뭄에 콩 나듯 3번처럼 여겨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아직 내가 뭘 잘하는지 잘 모르던 초년생 무렵에는 고민이 많았다. "보현 기자는 참 소녀 같어~", "보현이는 참 착해"라는 말을 칭찬으로 곧이듣지 못했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지 않거나 무섭게 물어뜯지 않는 호구 같다는 뜻일까? 나중에 그 말을 했던 취재원과 인간적으로 정말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 무렵, 전국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던 사건을 함께 겪어 나가는 와중에도 자신을 배려하려 하던 태도를 고마워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내가 다르게 살아왔을지언정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고 마음을 놓게 해 준 취재원은 또 있다. 태어날 때 뱃속에서부터 붙임성을 타고난 것처럼 밝고 성격이 좋은 홍보팀 사람이 한 명 있다. 무엇보다도 대화하는 상대방을 정말 편안하게 해 준다. 그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팀 사람들은 전부 그렇다. 업계의 다른 취재원의 말에 의하면 그 팀은 그런 점 덕분에 기자들에게 정말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와 통화를 할 때면 꼭 나까지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무척 신이 나고, 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 뒤 전화를 끊는다. 어느 날 저녁 둘 다 술을 진탕 마시고 취했을 무렵, 같이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솔직하게 그런 점이 고맙다고 전했다. 돌아온 답은 나를 놀랍고 기쁘게 했다. "전 정말 보현 기자님에게 전화가 오는 게 좋아서 그런 거예요. 기자님은 이런 점이 이렇다, 저런 점이 저렇다고 하면 많이 이해하고 배려해 주시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기자님한테는 믿고 전부 다 말씀드릴 수 있는 거고요."


    그런 와중에 1번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연차가 차도 끊이지 않는다. 주로 선배들이다. 연차가 지금보다 더 낮을 무렵, 취재원과 웃으면서 통화했다가 '얕보이면 안 된다'라고 혼난 적이 있었다. 좀 더 전문적인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몸집이 작고 마른 데다 대체로 사람을 상대할 때는 늘 웃기 때문에 선배들이 어떤 점을 걱정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 선의 자체를 팽개치지는 않고 고맙게 받아 들었으나, 무해해 보이는 여성으로 사는 일의 어려움은 당사자인 내가 가장 잘 안다. 웃으면서 대한다고 얕볼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도 얕보게 마련이다.


    다만 선배들의 걱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서, 내가 더 전투적인 태도로 무장해야만 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충고를 자주 들었다. 하지만 앞서 적었듯 나는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싫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대체 어떻게 월급을 받는지 의심스러운 사람들도 없지는 않지만, 절대다수는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는 것뿐인데, 굳이 평범하게 일 잘하는 사람들을 윽박질러가며 나오는 기사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죄송하다,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별로 똘똘하지도 않고, 기민하지도 않고, 있는 것은 오직 싸가지뿐이다. 재고 따지고 모르는데도 아는 척을 하고 때로는 깔아뭉개는 짓도 잘 못하겠다. 특별히 잘나거나 선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소심하게 생겨먹었다. 사람은 맞는 옷을 입고 생긴 대로 살아야 하기에, '곤조'를 부리지 않으면서, 기자답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있는 이야기만 가지고 기사 잘 쓰는 게 목표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부당함에 침묵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조직이나 개인에게 큰 문제가 있는 상황이라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자 때문에 힘들어서 일 못하겠다'는 말이 성실한 생활인들의 입에서 나와서야 되겠는가.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한 자리도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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