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서 돌리기만 하면 그만인지
찌라시(散·ちらし) [명사]
주의, 주장이나 사물의 존재 가치 따위를 여러 사람에게 널리 전하거나 알리기 위해 만든 종이쪽지를 속되게 이르는 말.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찌라시'를 대체할 만한 순우리말이 딱히 없냐는 개탄의 목소리(?)가 종종 들렸는데, 우리 세대에 와서 적어도 일부 집단에서는 적절하게 '받은글'로 순화된 모양이다.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지인에게 받아 메신저 창에서 창으로 전해지는, 말 그대로 '받아서 돌리는' 글이 '받은글' 또는 '받글'이다. '받)' 또는 '받은글)'이라는 문구 뒤에는 별별 내용이 다 들어간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잔여백신 접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을 무렵인 5월경 각 언론사별 백신 휴가 현황을 정리한 받은글이다. 지난해 코로나19의 대규모 유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을 당시에는 매체별 재택근무 현황을 모은 받은글이 공유되기도 했다. 명절 전에는 보너스(상여금) 지급 현황이 돌아다닌다. 같은 회사 사람보다는 같은 출입처의 다른 회사 사람과 더 친할 수 있고, 매체와 출입처가 다르더라도 하는 일의 골자는 거의 비슷한 독특한 업계라서 이런 일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보통 이런 받은글은 몇 바퀴 돌면 내용이 추가되며 더 풍부해진다. 타사들이 제공하는 복지란 그저 남의 일이기만 한 기자들이 자조와 유머를 담아 회사를 비꼬는 내용을 담기도 한다. 가장 웃겼던 건 '주님의 은혜'였다. 구천을 떠돌듯 주니어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떠돌던 이런 받은글은 언젠가 반드시 부서, 혹은 팀 단체방으로 흘러 들어온다. "국장, 보고 계세요?"와 같은 울분을 행간에 담아서.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귀여운 내용을 전하는 받은글 말고도 어디서 사건사고가 일어났다거나 하는 내용,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워딩과 상황 스케치 등을 담은 받은글도 있다. 이런 받은글은 '꾸미' 구성원을 통해 오간다. 꾸미란 쉽게 말해 여러 회사에 재직 중인 기자들이 소규모로 구성한 취재 연합체 같은 것이다. 챙겨야 할 현장은 많지만 몸은 하나이기 때문에 꾸미를 만든다. 꾸미에서는 정보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게 도의이자 불문율 같은 것이기 때문에 정보 교환이 활발히 이뤄진다. 그 정보라는 것에는 신빙성이 높거나 객관성이 담보된 받은글도 포함된다. 이 경우 분명 취재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적지 않은 받은글은 확인되지 않은 뜬소문으로만 이뤄져 있기도 하다. 어떤 중요한 사안 때문에 거의 밤을 새우고 있을 무렵 내가 "이렇다는 얘기가 있는데?"라고 말한 내용이 1분도 되지 않아서 받은글 형태로 한 바퀴를 돌아와 기함한 적도 있다. 심지어는 자신이 이만큼 소문에 밝다는 것, 즉 어떤 식으로든 출입처와 기자 사회 내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타인의 불행을 이용하는 사례도 숱하다.
몇 년 전 모 연예인이 극단적 선택을 한 직후 관할 119 구급대의 활동 동향 보고서라는 것이 널리 퍼지게 된 까닭은 왜일까. 최초 유출자는 내부인이었을지언정, 받은글을 기자 집단만의 독특한 문화처럼 여기는 데 그치며 분명히 존재하는 폐해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기자들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몇 시간 사이 몇 개나 되는 관련 받은글이 메신저 알림 창을 울리며 들어왔다. 심지어는 동료 기자가 당한 불의의 사고에 살이 붙어 퍼져 나가는 과정도 보았다.
묻고 싶다. 남에게 닥친 불행까지도 받은글로 만들어서 돌리면 자신이 업계에서 제일가는 소식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어깨가 으쓱해지는지. 아무리 남이 하는 이야기, 남이 사는 이야기를 집음하고 증폭해 벌어먹는 게 우리의 직업이라고 해도, 그저 가십을 즐길 뿐이면서 세상을 꿰뚫는 대단한 통찰력과 기동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해 으스대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