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주적
데스크 [명사]
1. 언론사에서 편집권을 가지고 아이템의 채택과 반려, 기사의 교열 및 송고 등을 담당하는 책임자.
2. 기자의 주적.
당직을 서러 출근하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출근한 사람이 없어 고요하기만 한 사거리에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빽 지르고 있었다. 태풍의 눈 위험반원에서 불특정 다수로부터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욕설, 정치권 인사들의 알맹이 없는 말잔치, 말이 되지 않는 데스크의 지시를 피할 새도 없이 맞아야만 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택시에서 내려 기자실에 도착하기도 전, 대체 현장 돌아가는 상황을 알기나 하는 건가 싶은 데스크 지시를 메시지로 받자 화를 참기 힘들었다. '클릭베이트'(clickbait) 용도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런 기사를 원한다는 의도가 너무나도 잘 보였다. 그리고 어차피 그 기사는 데스크가 아닌 내 이름을 달고 나간다. 불로 장생할 것만 같은 욕설과 창피함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당시 나는 딱 화병에 걸려 죽을 것 같은 상태였다. 출입처와 취재원들의 입단속은 삼엄하기 짝이 없어 취재도 쉽지 않았고, 어렵게 외곽 취재를 해 있는 사실만 가지고 기사를 써도 "받아 썼냐?", "(특정 직업을 깎아내리는 조야한 비속어)한테 접대받았냐?"는 비웃음을 듣기 일쑤였다. 후자를 생각하면 지금도 실소가 나오는데, 내 이름은 통상 여성에게 붙이는 흔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직업인으로서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수시로 배가 터지게 물을 먹을지라도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터무니없는 소설을 쓰지는 않는 것이었는데, 데스크라는 사람들은 나에게 스스로 존엄을 훼손할 것을 하루가 멀다 하고 요구하고 있으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데스크는 보통 부장을 지칭하지만, 넓게는 차장이나 편집위원, 부국장, 국장 라인까지 이르기도 한다. 즉, 편집국에서 편집권을 쥐고 있는 기자들이다. 이들 모두가 시급히 다루어야 할 아이템 및 현안에 대한 명확한 방향성과 잣대를 가지고 돌파할 수 없는 논거를 들어 기자들을 설득한다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졌을 것이다. 그들이 어떠한 비전도 내보이지 않고 그저 '많이 읽히는 기사'에만 꽂힌다면 기자들에게는 몹시 괴로운 시간이 시작된다. '많이 읽히는 기사'와 '좋은 기사'가 늘 양립하지만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자를 가장 미치게 하는 상황은 국장과 부장이 한 몸이 되어 현장의 실태와는 거리가 먼 기사를 '뇌피셜'로 발제해 꽂아 내리는 것이다. 기자의 보고를 무시하고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따라 쓰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지시를 하는 것도 넓은 범주에서는 여기에 포함된다.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는 사안을 담당하고 있다면 이런 지시를 받기 쉽다. 당연히 반발이 터져 나오기 마련인데, 자신의 권위가 훼손된다고 여겨 몹시 화를 내며 본인 의지를 관철시키려고만 하는 데스크도 있다. 도무지 설득이 되지를 않는다면, 데스크의 심기를 살살 맞추며 기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기사를 끌고 나가기도 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데스크의 의지를 최대한 수용하는 척하며 최대한 덜 소설 같은 기사를 쓰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괴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멀쩡한 기사는 물론, 최대한 머리를 굴려 존엄을 지키려고 분투하며 쓴 기사가 '답정너' 데스크에 의해 낚시 기사로 탈바꿈하는 때도 있다. 온라인으로 기사가 송출되면서 오보로 오인될 만한 제목을 달고 나가거나, 기사 본문이 너덜너덜하게 칼질돼 전혀 뜬금없는 내용이 기워져 있는 식이다. 일부 주니어 기자들이 "데스크 실명제 도입하라!"라고 피를 토하며 외치는 이유는 상당 부분 여기에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쪽팔려서 그렇다. 기사는 회사의 것이기도 하지만 내 작업물이기도 한데, 내 이름을 달고 있는 난생처음 보는 기사가 댓글창에서 난도질을 당할 때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2000년대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2000년대 초~중반부터 인터넷 언론사들이 우후죽순처럼 발호하고 뉴스가 포털사이트에 송출되면서, 독자의 눈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단 조악한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상식적인 사람들의 지탄을 받아 조금 시들해지나 싶더니 언제부터인가 다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지금은 2000년대도 2010년대도 아닌 2020년대인데, 어떤 데스크들은 아직도 사고가 20년 전에 머물러 있다. 어떤 언론사는 편집국 차원에서 그 같은 사고에 기반한 칼질 행위들을 장려하기도 한다.
물론 천우신조로 그렇지 않은 데스크를 만날 때가 있기는 하다. 좋은 데스크는 물음표로 기자를 딱 죽기 직전까지 후드려 팬다. 말이 되지 않거나 내용이 부실한 기사를 올리면 조용히 전화를 걸어 하나부터 열까지 찍 소리도 하지 못할 때까지 논파한다. 무엇보다도 현장 기자의 판단을 존중하고, 자신이 쌓아 온 취재 경험에 비추어 꼭 필요한 조언을 적시에 해 준다. 이런 데스크와 일하면 힘들어도 보람차다. 나날이 발전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블라인드 언론사 라운지에 올라온 '데스크 뚝배기 깨고 싶다'는 한 줄짜리 글의 추천수가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올라가는 것을 보면, 저런 데스크를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천운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