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현 Oct 14. 2021

데스크·번외편

우산을 씌워 주는 상사

    존경할 만한 상사를 만난다는 것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복 받은 일이다. 나는 지금 그런 상사를 만나서 마음껏 내 인생의 호사를 누리고 있다. 부장의 입장에서는 불운하게도, 그의 잘못이 아닌 다른 일로 후배가 우울증에 걸리고 잔뜩 위축되어 버린 탓에 여간 답답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일주일치 사회성을 몰아 쓰는 자리에서 잔뜩 기진맥진해진 뒤 "부장 뵙고 힐링할 거야!"라고 외치면서 부장이 계신 술자리로 씩씩거리며 찾아갔다. 시간제한이 있는 탓에 아니나 다를까 다들 일찍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말술인 우리 부장도 불콰해진 것이 꽤나 달리신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상반기 인사평가 때 부장이 내게 부서 꼴찌를 준 게 너무 서운하다고 툴툴거렸다.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린 상황에서 후배에게는 힘든 티도 내지 못하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힘들다고 투정도 부렸다.


    음악 앱 플레이리스트를 뒤적거리던 부장은 "너는 그래 나를 못 믿나?"라고 하더니 별안간 양팔을 쫙 펼쳐 보였다. "막상 닥쳐 보면 별 일 아닌데, 너는 네 앞에 놓인 모든 일을 실제보다 크게 생각하고 겁을 집어먹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보는 너의 한계는 이만큼인데," 그리고 부장은 벌린 팔을 반쯤 좁혔다. "너는 이 정도라고 믿는 것 같아. 네가 힘들 때는 이 중간쯤에 있는 거고," 그리고 부장은 다시 팔을 조금 더 벌렸다. "그러면 이제 멘붕이 오기 시작하는 거지. 너는 더 잘할 수 있는데." 내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부장의 진심 어린 말을 한 귀로 흘리지 않을 정도로 힘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다음날 일정을 쭉 정리해 보다가, 부장의 조언을 되새기면서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려던 정신줄을 다시 부여잡았다. 부장은 합리적인 사람이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계속 우리에게 우산을 씌워 주고 있었다. 내가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 두고 설명만 제대로 한다면 이해해 줄 사람이다. 그렇게 정리하고 다음날 출근했다. 그리고 내가 더럭 겁을 집어먹었던 일은 정말로 생각보다 별 것 아니었다.


    인격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게 목표라는 부장은 이런 말도 했다. "내가 보기에 나는 80점짜리 사람인데, 누가 얘기하는 걸 들어 보면 200점은 되는 것 같다. 그러면 이제 덜컥 겁이 나는 거지. 평소에 잘하는 새끼가 하나 못하면 저 새끼 저럴 줄 몰랐다고 하잖아." 내가 평소에 "우리 부장은 좋은 사람이야!"라고 자랑하면서도 어렴풋이 하던 걱정을 본인은 이미 진작부터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동시에 저렇게 솔직하게 속마음을 내보이는 부장을 보면서, 내가 너무 '외강내유'형이라 속을 잘 털어놓지 않는다는 게 서운하다는 부장의 이야기도 이해가 됐다. 좋은 후배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는 나도 내 약한 부분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참이다. 그게 뭐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