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현 Nov 07. 2023

'사짜'를 거르는 방법

관상 말고 인상은 얼추 볼 줄 알아요

    모르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하면서 휴대폰 전화번호부에 등록된 사람의 수가 몇천 명을 우습게 넘어가면 관상은 볼 줄 모르더라도 인상을 통해 사람됨을 어림짐작하는 법 정도는 대충 배우게 된다. '쎄함'을 감지하는 레이더, 그러니까 '쎄이다'를 장착하는 때가 온다면, 기자 생활을 그럭저럭 할 만큼 했다고 볼 수 있겠다. 눈빛과 얼굴의 미묘한 주름, 목소리의 높낮이, 그 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를 초 단위로 스캔한 뒤 재빠른 판단이 이루어진다. "저 사람은 '사짜'구나!"


    이와 같은 능력은 어설픈 정의감과 일진에게 무어라도 보고해야만 한다는 압박감,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리숙함 등에 둘둘 휩싸여 경찰서로 내던져지는 수습기자 시절에 비약적으로 증진된다. 수습기자들은 경찰이 대체로 내가 포착한 사건의 사실 관계를 일부 확인해 줄 수 있을 뿐 기삿거리를 친절하게 건네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힘겹게 깨달은 뒤 경찰서 1층 로비를 배회하는 민원인들 쪽으로 취재용 더듬이를 돌리곤 한다.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즐거운 기분으로 경찰서를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생판 모르는 남인 주제에 다짜고짜 자신이 기자라고 주장하며 '너의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아 보거라'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성가시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말을 건 사람이 없는 용기를 단전부터 끌어모아 쭈뼛쭈뼛 말을 건 수습기자이든 기자 할아버지가 됐든 알 바 아닌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의 실패를 맛보고 나면, 기자 신분을 밝혔을 때 반색하며 이야기보따리를 줄줄 풀어놓는 민원인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보이곤 한다. 땡, 아쉽게도 썩은 동아줄이었습니다.


    기자를 지나치게 반가워하는 민원인들은 경험상 본인의 억울함을 무척 강조하며 사건의 규모를 1에서 10 정도로 부풀리곤 한다. 또 흑백이 명확히 가려지는 사건보다는 재개발·재건축 추진 과정에서의 분쟁, 임대인과의 갈등과 같은 사안으로 경찰서의 수사관들을 오랫동안 괴롭혀 온 경우가 많다. 듣다 보면 민원인 쪽의 잘못이 더 큰 것 같은 경우도 적지 않다. 주술 호응은 물론 앞뒤도 맞지 않는 단어의 홍수를 힘겹게 문장으로 정리해 전화로 보고하다 보면, 일진들은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와 분통이 터진다는 목소리로 짜증스럽게 묻는다. "야, 그래서 야마가 뭔데?"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일진에게 호되게 깨져 가며 '이야기가 안 되는' 사람들을 체에 거를 수 있게 되면 업무용 이메일이나 언론사로 직접 날아드는 제보 내용도 다르게 보인다. 세상을 바꿀 만한 신기술 내지 신물질을 발견했다며 희한할 정도로 확신에 차 있는 자칭 스타트업 대표들의 장광설도 콧방귀를 뀌며 한 귀로 흘릴 수 있게 된다. 얼마 전 같이 담배를 피우던 기자 동료가 "우리 수습이 알아보겠다는데?"라고 말하며 문자메시지 한 통을 보여 줬는데, 문장 하나하나가 전형적으로 '이야기가 안 되는' 민원인이 주장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냥 한 번 알아보라고 하세요. 부딪히면서 배울 필요가 있죠." 우리는 악마처럼 낄낄거렸다.


    아마 그 월간지 기자도 자신이 상대하는 사람이 '사짜'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 사진과 인터뷰 내용만 보고도 대강 짐작이 갔고, 인터뷰이가 모 재벌가의 3세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실으면서 그룹 이름을 명시하는 대신 '재벌가 3세로 알려진'과 같은 문구를 넣은 것을 봐도 그랬다. 그의 목소리와 몸짓을 비롯해 과거 저질러 온 기상천외한 사기 행각이 여러 방송 뉴스와 유튜브 클립 등을 통해 공개된 뒤에는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인터뷰 기사가 도화선이 되어 수사기관까지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기자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면 정말 물어보고 싶다. 어떻게 해서, 왜 그 기사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느냐고.

매거진의 이전글 아니 글쎄 모른다니까 그러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