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제정신으로 읽을 수 있을까
저녁 술자리에서 연합뉴스 속보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자마자 2012년 대선 당시 "똥갈보", "숫처녀" 운운하던 고은 시인과 그를 시대의 큰 어른인 것처럼 치켜세워 주던 안도현 시인, 그리고 문단 내 성폭력과 외롭게 맞서 싸우던 최영미 시인이 단박에 떠오르면서 맛 좋은 깨소금을 한 주먹 씹어 삼킨 기분을 느끼며 고소해하기는 했지만, 고백하자면 아직 한강 작가의 작품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 한때 지적 허영을 원동력으로 삼아 살아왔던 사람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독서가들과 문인들이 저마다 한강 작가의 작품 초판본, 심지어 신춘문예 당선작이 실린 신문 지면을 꺼내어 들며 앞다투어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 무척 부럽다.
이제 와서 교보문고나 도서관으로 달려가기는 너무 늦었고, 노벨문학상 에디션으로 표지갈이를 한 신판 내지 전집이 나오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 그런 와중에 〈채식주의자〉를 일찍이 읽었던 친구들이 "정말 이상한 책이었다"라고 입을 모으기에 맛이나 좀 볼까 싶어 온라인 서점 미리보기를 통해 앞부분만 조금 들여다보았다가 영혼이 조각나는 기분을 느꼈다. 〈채식주의자〉 3연작의 첫 번째 작품은 아내에 대한 화자의 감상으로 시작하는데,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아내를 열렬히 사랑하지도 않고 매력을 느끼지도 않지만, 그가 '노브라'를 선호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극히 평범하고 모나지 않아 성적 매력도 부족하고 경제적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나의 분수에 걸맞기 때문에 결혼하기로 했다." 불쾌감을 과장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물리적인 구역감을 느꼈다.
독립적인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대상화·물화되는 감각, "인간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너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언어적·비언어적 선언을 참아 넘겨야만 하는 감각은 늘 끔찍하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저 대목에서 나는 대학교에 진학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 잠시 스쳐 지나가거나 어쩔 수 없이 교류해야만 했던, 나를 '인간 껍데기를 쓴 말하는 인형'으로 취급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그들 중에서는 가부장 사회의 견고한 구조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종류의 권력을 체화하고 자라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더러 있었다. 아직 작품을 다 읽지 않았는데도, 화자의 아내(영혜)가 가엾고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는 알려고 들지 않고,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으면서, 단지 아내라는 자리에 간편하게 끼워 넣을 수 있는 부품에 걸맞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선택한 남자의 시선을 받는 기분은 과연 어땠을까.
혼자서는 도저히 맨 정신으로 읽을 자신이 없어서, 아마도 눈물을 펑펑 쏟느라 책장 넘기기를 힘들어할 것 같아서, 나처럼 노벨상 에디션을 기다리는 후배와 나중에 함께 고통받으며 괴로움을 이겨 내기로 했다. 돼지를 잡아 고향에서 크게 잔치를 벌이려던(십분 이해는 되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도 뭐라 말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부친을 만류하며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죽음들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고 기자회견을 하겠느냐"라고 기자회견도 고사한 한강 작가가 세상의 폭력을 해체하여 내놓은 결과물을 꼭 보고 싶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들을 원어로 읽으며 말맛을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