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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제 Nov 28. 2023

《무의미의 지평 위에서 아이는 어떻게 춤추는가?》—I

쿤데라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이다. 그는 그중에서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영원회귀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쓰였다고 말한다.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다. 무한한 반복은 인간 실존이 내릴 수 있는 ‘닻’이다. 니체는 말한다. “만약 네가 하고 싶은 모든 것에 있어서 네가 무한히 그것을 하길 원하는지를 확신하는지 자문하면서 시작한다면, 그것은 네게 있어서 가장 확고한 무게 중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회귀는 인간 실존이 세계를 긍정하기 위해 나아가기 위해 펼치는 ‘돛’이기도 하다.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은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그것과 화해하는 법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다시 받아들이려고 한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인간실존에게 이러한 영원회귀마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즉 이 소설은  ‘닻’과 ‘돛’이 달리지 않은 배에 오른 인간 실존을 그려내는 것이다.


쿤데라가 진술하길 소설의 핵심 인물인 토마시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문장, 혹은 핵심 상황에서 태어“났다. 그 문장은 바로 ‘[한 번뿐인 것은 없는 것이다]einmal ist keinmal.’ — 이는 니체의 다음 문장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이것이 삶이 아니었던가[War das das Leben]?’ 나는 죽음에게 말하고자 한다. ‘자! 또 한 번![Wohlan! noch einmal]’”


쿤데라가 토마시라는 인물을 통해 포착하려는 것은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비이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이러한 무의미는 사르트르의 ‘구토’와 일맥상통한다. ’구토‘의 핵심은 우연성과 무의미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물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의미)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무상적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이러한 무의미가 만들어내는 무중력이 인간의 구토를 유발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구토’는 신도 죽고, 니체의 영원회귀마저 부재하는 혼돈의 험준한 파도 위에서—돛과 닻이 사라진 배 위에서— 인간이 느끼는 뱃멀미이리라.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악보에 아타카(신, 피안)도 없고, 다 카포(영원회귀)도 없이 끝마친다면, 그러니까 단악장의 음악이 딱 한 번 연주되고 끝이라면,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쿤데라의 소설은 바로 이러한 무의미의 지평으로부터 의미를 찾기 위해 어딘가로 나아가는 여정일 테다. 필연(신, 운명)도 우연(무의미)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딘가의 펼쳐진 개연(소설)이라는 미지의 땅을 향해.


孫潤祭, 202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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