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무 살이 되고, 할머니가 계신 지역으로 대학을 가게 됐다. 그로부터 할머니집을 종종 찾아갔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 혼자 사셨다.
할머니는 무려 8남매를 낳으셨는데, 사촌들이 너무 많아서 내 이름도 까먹기 일쑤였다. 엄마는 나를 낳을 때 할머니가 들여다 보지도 않았다는 말을 달고 살았고, 할머니가 니 이름이나 알겠냐며 평생 할머니를 원망했다.
할머니집은 지하철역에서 가파른 언덕을 한참 올라야 했다. 나는 매번 과일 몇 종류와 과자들을 한가득 사갔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그 언덕을 수십 번 왕래했다. 혹여나 뒤로 꼬꾸라질까 봐 허리를 숙이고 올라야 했다. 그 동네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다녔다.
때마다 할머니는 나를 딱히 반기진 않으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매번 내가 곧 아사할 사람인 것 마냥 한 상 가득 밥을 차려 놓으셨다. 그것도 모자라 직접 걸어 나가셔서 통닭도 두 마리씩 사다 놓기 시작하셨다.
할머니는 항상 나와 같이 밥을 먹지 않으시고는 남긴 것들만 뒤늦게 드시곤 했다. 같이 밥을 먹자고 해도 할머니는 영 드시질 못했다. 연로한 탓이다. 내가 남긴 밥은 버리기가 아까워서 드시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미어졌다.
내가 사들고 간 먹거리도 고스란히 내가 다시 먹게 됐다. 숨 좀 돌릴라치면 귤을 까서 내 입에 집어넣으시고 내 등을 톡톡 두들기시며 이것저것 먹으라고 권하셨다.
내 입은 쉴 틈이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통닭 두 마리를 다 못 먹고 남겼더니, 왜 이렇게 못 먹냐며 심각하게 걱정하시곤 했다. (난 이미 누가봐도 건장한 체격이었다.)
할머니가 뭐라도 드시는 걸 보기 위해 나는 더욱더 바리바리 싸들고 갔다. 그래도 할머니는 드시지 않았다. 그저 입맛이 없다고 하셨고,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가셨다.
그렇게 야윈 할머니는 항상 통닭 두마리를 잊지도 않고 사놓으셨다.
그러던 어느 새벽, 할머니가 나를 불러 깨웠다.
“야이야... 인나 봐라, 함 나가봐라. 손님 왔다. 문 좀 열어 주래이.”
“할머니, 이 새벽에 누가 와요?”
“저, 저 있잖아. 문 밖에 기다리고 섰네.”
나는 현관으로 나갔다. 옛날 집이라 인터폰도 없었을뿐더러, 불투명한 창이 끼워진 낡은 현관문 너머로는 어둠만 가득했다.
“누구세요?”
정적만 흘렀다. 까만 밤 뒤로 누가 서있더라도 구분이 가질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인기척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해놓고도 혹여나 창문 너머 그림자라도 볼까 싶어 눈을 꼭 감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할머니는 종종 오밤 중이면 나에게 불쑥 손님에게 문을 열어주라고 했다. 난 몇번이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언제나 할머니는 누가 문 밖에 서있다고 대답했다.
행여나 그 반갑지 않은 손님이 할머니를 나에게로 부터 데려갈까싶어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얼마가지 않아 할머니는 쓰러지셨다. 폐암 말기였다.
나는 호박죽, 단팥죽, 야채죽 등을 한가득 사들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시지도 못했다. 할머니는 야위다는 말을 지나쳐
그저 뼈 밖에 남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가 사들고 간 것들 역시 드시질 못했고,
그렇게 할머니는 계속 사경을 헤매셨다.
할머니를 찾아간 날 마다 나는 한심하게도 집에 와서 줄담배를 펴댔다.
얼마 가지 않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난 무덤덤하게 할머니 상을 치렀다. 잠도 안자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내가 감수 할 수 없을 만큼의 슬픔이 덮쳐올 것 이라 생각했지만 슬프지 않았다.
어쩌면 밤마다 찾아오는 그 손님들 때문에 나는 할머니가 오래 사시지 못했을 거라고 은연 중에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년 후 그 가파른 언덕을 올랐었다. 할머니 집은 사라졌지만 그 언덕길 중 치킨을 파는 그 가게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기억 속에 숨어있던 할머니가 차려주던 밥상, 할머니 목소리, 할머니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감히 조건이 없다.
사랑은 대물림도 아니며, 빚도 아니다. 시간과 그 사랑의 크기는 비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할머니가 늘 차려놓으셨던 통닭 두마리의 의미를 알기엔 아직도 나는 너무나 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