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구미
어제부터 글을 못쓰겠다. 방해물은 ‘잘 쓰고 싶다’라는 나만의 욕심. 잘 쓰지 않아도 그냥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추구한다.
어린이의 교육과정 되기 책을 다 읽었다. 마지막 물질성의 질료화~물질성 문제, 후기까지 읽고 나니 ’아 알겠다‘ 가 아니라 더 복잡해졌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을 써보고자 한다. 읽는 동안 어린이의 교육과정 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한 삶을 보낼까 하고 생각했기에. 교사로서 나의 추구미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어린이를 생각하면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키가 작고 앳된 얼굴, 순수하다고 표현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렇다. 어린이라는 단어에 또 떠오르는 단어가 있는가? 어른. 어린이 옆에 있어서 더더욱 키가 크게 느껴지고 아이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듯 빙그레 웃는 어른을 그린다. 어린이와 어른. 우리는 둘을 반대라고 개념지으며 이분법 속에서 살아간다. 다음 장면을 재생시킨다면 어른이 어린이를 안아주고 어린이는 그 속에 안겨 포근한 표정을 짓는, 머리에 힘을 많이 주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재생된다. 보호받는 어린이, 보호하는 어른. 수동과 피동의 관계로서 그들을 읽는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분법을 해체하라 말한다. 어린이ㅣ어른, 구분과 경계를 허물어 보라고. 부수라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내 앞에 셀러스 교수님은 망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언어로 나의 경계를 깨부순다. 어린이는 보호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존재 그 자체로 유능성을 가지고 주체적인 힘을 가졌다. 어른이 어린이에게 권리를 내어준 것이 아니라 어린이의 권리는 태어날 때부터 원래 항상 함께 숨 쉬고 있었다. 어른이 부여하고 평가내리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동등한 존재로서 어린이를, 어른을 바라보겠다. 어른이 무릎을 구부리고 눈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같은 위치에 서있는 우리를 만나겠다. 이런 어린들에게 그렇다면 어떤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까? 어린이의 삶이 되는 교육, 삶으로서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경험과 교육은 삶과 연결지어져야지 따로 떼어내거나 단절되면 안된다. 삶이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면 우리의 일상을 하나씩 짚어본다. 아침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사람들과 관계하고 무언가를 잡고 손을 펴고 다리를 움직이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교육을 위한 교육이 아닌 사람 전체의 삶으로서의 교육이라는 말이 머리를 띵하게 한다. 나는 이제까지 어떤 교육을 하고 있었는지도 살펴본다. 내가 보고 싶은 교육을 한 건 아닌지, 내가 보았던 건 어린이들이 맞는지 성찰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바라볼 수 있다. 어린이를. 어린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존재로서 살아가는지. 하나 하나 그들의 이야기를 만날 생각에 벌써 마음이 간지럽다. 그리고 나만의 시선으로, 나 혼자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겠다 다짐한다. 글에서, 대화에서, 책에서, 패드에서 다채로운 세계 속에서 다양하게 바라보고 단정짓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어린이의 교육과정 되기 책이 내어준 선물을 펼치고 입을 준비가 되었다. 내가 추구하는 어떤 교사가 될지, 어떤 사람이 될지 나도 모르지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