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대는 예과 2년과 본과 4년으로 구성된 6년제 대학이다. 남들보다 대학을 2년 더 오래 다니니 학비와 생활비를 부모님께 도움받는 나로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웠...기보단 당시 철없던 나는 사실 별 생각 없었다. 그저 남들보다 더 오래 대학생으로서의 방학을 즐길 수 있어 좋아했었다.
중학생 시절 친구들끼리 팀을 짜 일본 여행을 갔었다. 나와 내 친구, 그리고 사촌과 사촌의 친구들. 이렇게 또래 남자 6명이서 A4 용지 몇 장에 적혀있는 대로만 찾아 다니는 여행이었다. 친구들과 동네에서 놀기 바빴던 터라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해외 여행을 모르는 또래와 함께 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여행을 다녀오면 그 당시 굉장히 핫했지만 지금은 바닥 뚫고 추락한 어느 가수가 선전하던 초고속 인터넷 ADSL을 설치해주겠다는 어머니의 제안이 들어왔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육체적, 경제적인 면에서 참 비효율적이고 낯 부끄러운 추억이 가득한 여행이었지만 그렇게 등 떠밀려 간 여행은 참 좋았다. 첫 해외여행의 기억이 좋아서인지 그 이후로는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 해외 여행을 다녔다. 이러한 여행의 정점을 찍었을 때가 바로 대학 방학 시절이다. 하지만 여행만으로 방학을 채우기엔 6년제 대학생의 방학은 너무나 길고 많았다. 무려 두 달씩 11번이지 않은가! 그래서 한 달의 여행 기간을 마친 뒤에는 어김없이 한 달간 실습 생활을 하였다.
방학을 앞 둔 어느 날, 강의실 옆에 자리 잡은 학교 내 게시판에 에버랜드 동물원에서 실습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이미 이전에도 젖소 농장, 반려 동물 병원, 반려 동물 전용 CT 센터 등 여러 분야에서 실습 생활을 했던 나였기에 '동물원'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날 바로 실습 지원서를 써냈고 얼마 후 에버랜드 동물원에서 실습생으로 뽑혔다는 연락이 왔다.
낯선 경험을 해볼 수 있다는 이유로 지원을 하긴 했지만 그곳에서의 실습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내가 과연 동물원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 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방학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아기 사자에게 젖병을 물리거나 침팬지의 손을 잡고 동물원 산책을 하고 돌고래 머리를 쓰담으며 생선을 던져주는... 물론 실습 기간 중엔 무엇 하나 해보지 못했다.
처음 연락받고 간 곳은 동물원이 아닌 서비스 아카데미라 불리는 에버랜드 근처의 교육 시설이었다. 놀이 동산을 방문한 고객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모든 직원들은 이곳에서 관련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비록 방문객을 상대할 일 없는 실습생이었지만 나에게도 이 교육은 필수 사항이었고, 현실 세계에선 절대 쓰지 않을 것 같은 멘트를 오글거리는 목소리로 반복해 외치며 실습 첫날을 마쳤다.
이튿날 본격적인 실습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에버랜드 동물원에 계시던 수의사 선생님은 총 3분이셨고 내가 그곳에서 할 실습 내용은 그 분들의 진료 보조였다. 실습 전 내가 상상했던 바와 전혀 다른 내용이었지만 그곳 에서의 짧은 경험은 평생의 추억 거리가 되었다. 맹수에게 쏠 블로우 건(입으로 불어서 쏘는 마취총)의 총알을 만들고 독수리의 날개를 잡아 방사선 사진을 찍고 물개의 채혈을 위해 지느러미 혈관이 잘 보이도록 불빛을 비추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