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희남이로소이다 - 02
두 번째 요건은 바로 담대함이다. 동물 병원의 특성상 우매한 개들이 많이 온다. 이들은 감히 고양이에게 시끄럽게 멍멍대며 달려들 때가 있다. 이때 겁 많은 병원 냥이는 쏜살같이 도망치는데 문제는 이 순간에 정상적인 경로로 질주할 수 없음에 발생한다. 이런 극도의 흥분 상태에선 왜인지 주변이 잘 보이지 않고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방향 전환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경로 상에 있는 여러 물체들을 파손시키며 질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런 질주로 다른 집사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랭이는 이러한 사실을 아무리 설명해도 타고난 간이 작아서인지 내 설명은 듣지 않는다. 덩치는 산만한 게 간이 콩알만 한 지 무슨 일만 있다 하면 그저 전속력으로 질주할 뿐이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기물 파손으로 병원 집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매한 개들을 더욱 흥분시킨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우리 병원에 어른 인간만큼 큰 개가 종종 온다. 그중 봄이라는 시커먼 스탠더드 푸들이 있는데 이 녀석의 특기는 목에 묶인 줄로 인간을 끌고 다니는 것이다. 평소 대형견이 병원에 올 경우 병원 집사들이 우리를 뒤쪽 고양이 전용 공간으로 에스코트해준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겨를도 없이 봄이 녀석이 병원 안으로 들어왔고, 마침 오른쪽 옆구리를 햇볕에 지지고 있던 나에게 저돌적으로 다가왔다.
처음 대형견을 가까이서 마주한 나는 이 녀석의 덩치에 꽤나 놀랐다. 어찌나 크던지 그 녀석의 얼굴은 우리 중 가장 덩치가 큰 노랭이의 몸뚱이만 했다. 하지만 나는 봄이의 돌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광욕을 계속 즐겼고 봄이 녀석은 내 얼굴만큼 거대한 코를 나의 따뜻해진 오른쪽 옆구리에 대고 킁킁 거리며 불쾌한 콧바람을 몇 번 불더니 다시 다른 곳으로 인간 어른을 끌고 가버렸다.
“희남! 얘는 겁도 없어. 그러다 물리면 어쩌려고! 빨리 도망갔어야지.”
병원 집사들이 뒤늦게 이 상황을 파악한 후 핀잔을 주며 고양이 공간으로 나를 옮겨주었다. 하지만 이는 개의 습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내가 만약 부리나케 도망쳤다면 분명 봄이는 목줄을 잡고 있는 인간을 휘날리며 쫓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담대함으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녀석도 별 관심 없이 나를 지나친 것이다. 나의 담대함이 제대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갖춰야 할 요건은 바로 외모다. 병원 냥이로서의 외모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다들 아름답거나 치명적으로 귀여워야 한다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다면상(多面相). 얼굴 근육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다양한 상(相)을 연출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 있어서 정말 나는 완벽한 병원 냥이다. 등이 가려울 땐 아름다운 상, 얼굴이 가려울 땐 귀여운 상, 손길이 귀찮을 땐 화난 상,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상은 바로 나진짜억울해 상이다. 상황에 맞춰 나의 뜻대로 변하는 내 얼굴 덕분에 나는 병원생활을 아주 편하게 할 수 있다.
집사들의 퇴근 후 병원 앞 대로를 달리는 각양각색의 차들을 구경하며 한 밤의 고요함을 만끽하던 중 허기짐을 느꼈고 그제야 어리석은 병원 집사 놈들이 사료 그릇을 채워놓지 않고 퇴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물 병원 특성상 지천에 널린 게 사료 봉투이지만 이를 뜯었다간 분명 다음날 아침부터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을 알기에 내 장기인 참을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쁜이는 여전히 참을 줄 몰랐다. 배고픔에 짜증이 잔뜩 난 이쁜이는 결국 가장 맛있어 보이는 사료를 골라 봉투에 구멍을 내었고, 그 구멍을 통해 사료가 쏟아져 내렸다.
‘어이구, 이쁜이 이놈 결국 사고 칠 줄 알았어. 내일 아침부터 집사들한테 혼나게 생겼네. 쯧쯧.’
나는 카운터에 앉은 채 바닥에 떨어진 사료를 씹어 먹는 이쁜이를 속으로 나무란 뒤 애써 외면했지만, 한 밤의 고요함은 이쁜이 입 안에서 울리는 오도독 오도독 소리를 더욱 생생하게 내 귀에 전달해 주었고, 이는 배고픔을 참고 있던 나에겐 너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쁜이는 한 밤중의 식사를 마치고 특유의 미끄러지는 듯 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갔고 대기실 바닥에는 이쁜이가 먹다 남긴 사료가 놓여 있었다. 집사들이 출근하려면 아직 한참 남은 시간, 배고픔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갔고 바닥에 널브러진 사료 알갱이들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나를 유혹해댔다.
사실 그 상황에 이쁜이를 말릴 수 있었다. 너의 그 행동으로 우리가 다음 날 얼마나 피곤해지겠느냐며, 혹여나 어떠한 제재가 가해지면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이쁜이의 만행으로 나의 배고픔이 해소될 수 있다는 내 안의 작은 악마의 속삭임이 있어서일까. 게다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결국 나도 바닥의 사료들로 굶주림을 해결한 뒤 몸을 구석구석 정리한 뒤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고 집사들이 출근을 하였다. 예상대로 뜯긴 사료 봉투와 바닥에 흩어진 사료 알맹이를 보고 집사들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머, 어떡해. 누가 사료 뜯어 놨어요!”
“진짜? 누구지? 희남인가? 이쁜인가?”
‘너네가 밥을 안 주고 갔잖아!’
따지고 싶었지만 어차피 말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변명이 아닌 바로 나진짜억울해 상이니까. 나의 얼굴을 본 원집사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윽고 이쁜이를 찾아 나섰다.
“아무래도 이쁜이가 그런 거 같아요. 야! 이쁜이! 너 이게 뭐야! 응? 이것 봐봐!”
이쁜이를 뜯긴 사료 봉투 앞에 데려다 앉힌 뒤 원집사는 이쁜이를 나무랐고, 잠시 후 막내 집사가 원집사에게 사과를 한다.
“선생님, 어제 얘네 밥을 안 주고 갔나 봐요. 죄송해요.”
아름다운 결말이다. 이처럼 상황에 맞는 표정 연기는 내 삶의 질을 더욱 높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