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던지는 이런 말에 나는 정말 입이 쓸 때가 많다. 내가 하는 일이 멋진가. 진짜? 출근시간은 있으나 퇴근시간은 없는. 남들 노는 주말, 휴일에 일하고, 밤낮없이 일해도 통장은 늘 ‘텅장’인데. 내가 도대체 뭐가 멋지다는 건지. 화려하고 멋진 무대, 박수받는 건 배우들이지 내가 아닌걸.
나는 친구들에게 소위 ‘예술하는 친구’다.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예술가들과 함께 일하고, 예술 장르 하나의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고 있으니 그냥 예술가라는 부류에 어설프게 꼽사리 끼어 통칭되곤 한다.
수많은 예술가가 가난에 허덕인다. 나도 거기에 자동적으로 포함되는 인생이다. 친구들은 예술가들에게 따라붙는 ‘창작의 고통’, 그 언저리에 있는 무엇을 나 또한 품고 살 것이란 막연한 생각은 하고 있을 거다. 그래도 뭔가 창의적이고 즐거운 일이 더 많으리라는 기대감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내 현실은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의외로 엉덩이 붙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씨름해야 하는 시간이 많다. 동료들 중에는 일반 직장인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거북목도 많다. 손목의 문제도 많이 달고 살고. 장시간의 회의도 많고, 서로 언성 높이며 피 튀기게 싸울 일도 허다하다. 여기에 배우 스태프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작품을 찾는 관객들의 입맛도 맞춰야 한다. 현장에서 직접 응대도 해야 하니 서비스 직군이 많이 힘들어하는 ‘감정 소모’도 꽤 크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일반 직장인들이 하는 업무에 ‘플러스알파’가 더 붙는 것이다. 이렇게 일이 많아지니 그에 따른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더 계산받아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떠한가. 일반 직장인들에게 훨씬 못 미치는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다. 불안정하다.
문예회관 소속이 아니라면, 초과 근무나 야근, 주말 당직 수당 같은 건 없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꿈, 열정, 자아실현 등의 허울 좋은 명목 하에 우리는 젊음을, 열정을 다 쏟아낸다.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실속은 하나도 없는.
정규직으로 입사하고도 수년간 “이번 달은 월급이 제때 나오려나?” 이 생각을 늘 했다. 늦어지면 얼마나 늦어질까. 죽기보다 싫은 카드값 독촉 전화는 받기 전에 입금은 될까. 일상처럼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 구질구질한 걱정들을 꽤 오랜 시간 안고 살았다. 월급의 많고 적음은 처음부터 초월했다. 제날짜에 통장에 찍히는 것만으로도 감사가 넘쳤다.
내 입으로 아무리 열악하고 힘들다고 말해도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친구들이 별로 없는 듯했다. 어느 때는 구질구질하게 내 밑바닥을 다 까발릴 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무얼 위해서. 그러니 허울 좋은 개살구의 모습으로, 그리 지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친구들의 그런 말에는 내가 힘들게 일하는 것도, 어려운 업계 현실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곳에서 분투하는 나에게 힘내라고 응원하기 위해 던지는 것일 뿐 실제로 ‘멋지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담겨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따금 내 앞에 작은 분노가 쌓여감을 느낀다. 나와 내 동료들이 이토록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남들 24시간을 25시간, 26시간으로,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살고 있는 우리인데, 언제쯤이면 현실적인 보상을 제대로 받으면서 살 수 있는 것인지. 뮤지컬이 산업화되고 늘어난 관객 인구와 함께 매출 규모도 상당히 증가했다는데, 우리의 삶은 왜 이리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 그러니 이 업계를 동경하는 학생들에게 나의 직업을, 이 길을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가 없다. 그들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학창 시절 부모님이 ‘연극영화과’에 가겠다는 뜻을 막으셨던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일 거다. 연극 따위를 해서는 가난을 면치 못할 것. 예술가는 가난하고 제대로 된 밥벌이를 하며 살기가 힘들다는 것이 부모님 세대의 생각이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대중의 큰 인기를 바탕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사는 스타들의 삶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름 없이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배우, 예술가들이 훨씬 많다. 온전히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게 집안의 도움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면 시시때때로 아르바이트를 뛰어야만 한다. 집세도 내야 하고 핸드폰 요금도 내야 하니까. 그런 면에서 매달 월급을 받는 기획사 직원들의 삶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우리의 삶이라고 뭐 얼마나 크게 다르겠냐마는.
직장 생활 10년이 넘어가면 회사에서 친구들의 직급도 연봉도 꽤 안정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들의 삶과 비교하면 내 주머니는 빈약해도 너무 빈약하다. 그래서 때로는 현실의 문제를 모르는 척하고 싶다. 어느 시점이 되니 친구들 사이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부동산 이야기다. 자신의 집을 사는 문제뿐 아니라 제2의 집을 사고팔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친구들의 이야기에 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부자가 아니다. 현재 가난한 것이 맞다. 하지만 미래가 불안하진 않다. 과거에는 노후가 막막할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이제까지 걸어온 길에서는 경제적인 부분을 여전히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치열하게 분투하며 살아온 시간에 대한 자긍심이 있다. 몇 년 전까지는 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욕심내고,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을 ‘저급한 욕망’쯤으로 치부했다. 거의 금기시하며 살았다. 이제는 아니다. 나에 대한 가치, 능력을 충분히 보상받기 위한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계획을 세우고, 그림이 그려지니 그리 걱정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이 분야에서 일해 오면서 소위 말하는 ‘타이탄의 도구’를 자연스레 많이 갖추게 됐다. 작품을 개발하고 그것을 세상에 알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유효한 방법들을 공부해 왔다. 디자인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을 익히며 감각을 키웠다. 일련의 모든 과정을 글로 써서 정리하는 걸 반복하면서 자연스레 익히게 된 ‘나만의 무기’가 있다.
현재의 물리적 결핍이 걱정되지 않는 이유다. 앞으로 내가 펼쳐갈 새로운 꿈의 세계는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란 믿음이 있다. 사실, 나는 이미 부자다. 현재의 내 삶에서 감사의 기도 제목이 넘친다. 오늘 내가 땀 흘리는 만큼 내일은 조금 더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 이 있다. 현재의 삶에도 충분히 기쁨이 넘친다. 이것이 부자의 삶이다. 나는 부자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