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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부자입니다

by 이피디

학창 시절 부모님이 ‘연극영화과’에 가겠다는 뜻을 막으셨던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일 거다. 연극 따위를 해서는 가난을 면치 못할 것. 예술가는 가난하고 제대로 된 밥벌이를 하며 살기가 힘들다는 것이 부모님 세대의 생각이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대중의 큰 인기를 바탕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사는 스타들의 삶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름 없이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배우, 예술가들이 훨씬 많다. 온전히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게 집안의 도움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면 시시때때로 아르바이트를 뛰어야만 한다. 집세도 내야 하고 핸드폰 요금도 내야 하니까. 그런 면에서 매달 월급을 받는 기획사 직원들의 삶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우리의 삶이라고 뭐 얼마나 크게 다르겠냐마는.


직장 생활 10년이 넘어가면 회사에서 친구들의 직급도 연봉도 꽤 안정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들의 삶과 비교하면 내 주머니는 빈약해도 너무 빈약하다. 그래서 때로는 현실의 문제를 모르는 척하고 싶다. 어느 시점이 되니 친구들 사이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부동산 이야기다. 자신의 집을 사는 문제뿐 아니라 제 2의 집을 사고팔고.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친구들의 이야기에 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부자가 아니다. 현재 가난한 것이 맞다. 그렇다고 내 삶이 우울하냐. 그건 또 아니다. 미래가 불안하진 않다. 과거에는 노후가 막막할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이제까지 걸어온 길에서는 경제적인 부분을 여전히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치열하게 분투하며 살아온 시간에 대한 자긍심이 있다. 몇 년 전까지는 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욕심내고,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을 ‘저급한 욕망’쯤으로 치부했다. 애써 금기시하며 살았다. 지금은 다르다. 나에 대한 가치, 능력을 충분히 보상받기 위한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있다. 계획을 세우고, 그림이 그려지니 그리 걱정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이 분야에서 일해 오면서 소위 말하는 ‘타이탄의 도구’를 자연스레 많이 갖추게 되었다. 작품을 개발하고 그것을 세상에 알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유효한 방법들을 공부해 왔다. 디자인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을 익히며 감각을 키웠다. 일련의 모든 과정을 글로 써서 정리하는 걸 반복하면서 자연스레 익히게 된 ‘나만의 무기’가 생긴 것이다.


현재의 물리적 결핍이 마냥 걱정되지 않는 이유다. 앞으로 내가 펼쳐갈 새로운 꿈의 세계는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란 믿음이 있다. 사실, 나는 이미 부자다. 현재의 내 삶에도 감사의 기도 제목이 넘친다. 오늘 내가 땀 흘리는 만큼 내일은 조금 더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도 있다. 현재의 삶에도 충분히 기쁨이 가득하다. 이것이야말로 부자의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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